최천호 목사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십자가를 진 신석구’

신석구 목사는 홍천에서 정식 전도사가 되어 교회를 섬기다 1917년 9월 23일 원산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8년 10월에는 서울 수표교 교회로 파송을 받게 되어 강원도 산골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던 식구들도 도시 생활에 큰 기대를 하고 서울로 이사를 왔다. 신석구 목사 자신도 그동안 중단하고 있던 신학 과정도 마칠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되었다. 신석구는 1908년에 감리교 협성신학원에 입학하였으나 아직도 신학을 마치지 못한 것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이었다. 개인부채 60원 때문에 전도사 시험에도 낙방한 그는 매달 선교부에서 나오는 생활비로는 가족의 생계를 감당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2남 1녀로 늘어난 자녀들의 생활비와 교육비도 큰 문제였고 틈틈이 빚도 갚아야 했고, 강원도 산간지역의 목회 환경에서는 신학 수업을 받기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제는 서울에서 목회하면서 신학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지만, 세상 돌아가는 상황은 신석구로 하여금 편안하게 목회하면서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전개되지 않았다. 그의 수표교 교회 담임자로 목회는 5개월 만에 중단되었고 신학교 졸업도 3년 이상 연기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3.1운동이다.

국권침탈 이후 10년은 무단통치로 표현되는 강압적 탄압과 폭력의 시대였다. 이미 한 말 때부터 교회가 민족운동의 중요한 거점으로 이용되었음을 파악하고 있던 일제는 국권침탈과 함께 민족 운동가들에 대한 회유와 탄압을 병행하며 교회의 민족운동 가능성을 소멸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회유의 방편으로 나온 것이 교계 지도자들의 잦은 일본 방문과 일본 기독교계 대표들의 방한 활동이었다.

남감리회 일본 교계 지도자들이 자주 찾아와 회유 연설을 하였고, 친일파 선교사를 내세워 합병의 타당성을 선전하기도 하였다. 회유에 넘어가지 않는 골수 민족 운동가들은 체포하여 잡아 가두고 고문을 가함으로 독립 의지를 꺾으려 했는데, 1911년 일어난 ‘105인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윤치호를 비롯하여 100여명의 기독교인들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상당수 민족 운동가들은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 해외로 망명하여 해외에서 독립운동 전초 기지를 구축하였다. 국내에 남은 민족주의자들은 해외 민족 운동가들과 은밀히 연락을 취하며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안한 14개 조의 전후처리 원칙 중에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소위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희망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해외 언론을 통해 ‘민족자결주의’와 파리 강화회담 소식을 접한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의 기회로 삼고자 하여 대대적인 독립시위를 하는 것으로 운동 방향을 잡았다. 중국 상해의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조직한 신한국청년단과 일본의 기독교청년회 회원들이 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국내에서도 민중을 동원할 계기가 마련되었는데,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68세 일기로 승하하여 전 국민이 참가하는 국장의 기회가 온 것이다. 고종의 죽음을 두고 ‘일본인에 의한 독살설’이 확산하고 있어 항일 저항 운동의 불씨를 키우던 국내외 독립 운동가들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상해 신한청년단에서는 김규식을 강화회담 대표로 파견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하는 한편 1919년 2월 초 선우혁을 국내에 밀사로 파견하여 국내 민족운동 조직과 연대에 나섰고, 일본에서는 1919년 2월 8일 유학 중이던 청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여 그 의지를 대외에 알렸다. 이 같은 해외의 움직임이 국내에도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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