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일(극동대학교 언론홍보학과 교수)

 ‘인간의 조건’(KBS2)은 현대 문명의 필수 조건을 하나씩 가감해 봄으로써 진짜 인간답게 살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지를 짚어보는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다. 여섯 명의 인기 개그맨들이 일주일 동안 합숙하며 주어진 미션을 수행하는데, 공동으로 생활하는 것 외에는 평상시와 똑같이 생활하면 된다. 다만 미션을 체험하면서 그들의 생활패턴이나 의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줌으로서 시청자들에게 재미와 더불어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준다.

  2012년 11월 파일럿으로 방송되었을 때 주어진 첫 번째 미션은 ‘핸드폰, 컴퓨터, TV 없이 살기’였다. 혹시라도 핸드폰을 잃어버렸거나 컴퓨터가 고장나 인터넷을 사용하지 못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미션이었다. 당장 매니저와 연락이 안 돼 방송국에도 가지 못하는 당혹스런 상황을 보며 시청자들은 즐거움을 느꼈고, 현대 문명의 이기를 놓아버리니 오히려 삶이 느긋해진다는 사실에 묘한 여운과 감동을 맛볼 수 있었다.

  덕분에 이 프로그램은 2013년 1월 26일부터 정규편성되었다. 이후 ‘쓰레기 없이 살기’나 ‘물 없이 살기’와 같은 다양한 미션을 체험하면서 그동안 놓치고 살아온 것은 없는지, 진정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조건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공익적 예능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미션은 달라져도 멤버들의 행동은 별 차이가 없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힘들어 하다가도 쉽게 적응해버리는 패턴이 되풀이되면서 점점 식상해진 것이다. 게스트를 투입하거나 여성 개그맨 특집을 만들어보기도 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마침내 지난 3월 29일 방송을 끝으로 기존 멤버들을 하차시키고 프로그램의 전면적인 개편에 들어갔다.

  ‘인간의 조건’이 방송 15개월 만에 이런 한계에 직면한 것은 무한경쟁 시대에 리얼 버라이어티가 살아남기 위한 조건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 예능은 리얼 버라이어티 전성시대이다. MBC는 원조 격인 ‘무한도전’을 비롯해 ‘우리 결혼했어요’, 일요일 저녁 ‘아빠! 어디가’, ‘진짜 사나이’, 금요일 밤 ‘4남1녀’와 ‘나 혼자 산다’가 편성되어 있다. KBS 역시 일요일 저녁 ‘슈퍼맨이 돌아왔다’와 ‘1박2일’이 있고 SBS는 ‘런닝맨’과 ‘정글의 법칙’을 방송하고 있다. ‘꽃보다 할배’(tvN) 등 케이블방송에서도 유사한 포맷의 리얼 버라이어티가 넘쳐난다.

  이런 치열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프로그램의 공통점은 캐릭터 전략이다. 멤버들은 각자 주어진 역할 안에서 다른 역할을 맡은 출연자들과 관계를 형성하면서 고유의 캐릭터를 구축한다. 시청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가진 멤버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프로그램에 대한 몰입도도 높아진다. ‘무한도전’은 7명의 멤버들이 각자 고유의 캐릭터를 잘 살려서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다. ‘1박2일’은 강호동을 비롯한 1기 멤버들이 강력한 캐릭터를 구축함으로써 국민예능의 반열에 올랐지만 뒤이은 2기 멤버들은 그에 실패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인간의 조건’ 멤버들의 모습은 일반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개그콘서트’ 무대에서 최강의 캐릭터를 구축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덕에 ‘인간의 조건’에 출연하게 되었지만 자신이 가진 캐릭터를 모두 벗어버린 채 정말로 ‘리얼’한 모습만 보여주었다. 이것이 패착이다. 방송에서 ‘리얼’은 진짜 현실이 아니다. 현실 같이 꾸며진 허구일 뿐이다. 시청자들은 각 멤버들의 실제 생활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허구적인 캐릭터가 어려운 미션을 어떻게 재미있게 수행하는지 보고 싶은 것이다.
  앞으로 ‘인간의 조건’은 프로그램의 원래 성격은 유지하되 남녀 멤버들이 번갈아 가며 아이템을 진행하기로 하고 이번 주부터 방송을 재개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캐릭터 구축이라는 리얼 버라이어티의 기본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멤버 교체를 비롯한 어떤 시도도 별다른 약효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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