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공증인, 변호사)

 거리마다 내걸린 6.4 지방선거에서의 투표를 권유하는 홍보 문구중 많은 것은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 ‘지방자치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지방자치를 위한 이번 6.4 지방선거는 민주주의의 핵심적 기재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재미난 것은 이러한 상식적인 문구들은 역사적, 사상적으로 그리고 어떻게 보면 현실적으로도 진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의 ‘지방자치’에는 본래적 의미의 ‘자치(自治)’가 전혀 없고, ‘선거’는 역사적, 사상적으로 오히려 민주주의를 억압하기 위한 정치기획이었다.

 

 누구나 알고 있듯, 민주주의(democracy)는 고대 아테네의 ‘인민(demos)의 지배(kratos)’에서 유래한다. 그러면 '인민의 지배‘의 정치제도적 의미는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지배 없음‘, ’번갈아 지배하기‘, ’추첨‘으로 설명한다. 즉 각자가 스스로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최상이나, 그렇지 못할 때는 모두가 번갈아가며 지배하고 지배받는 것이 민주주의의 정수이며, 그때 대표와 지배자는 ’선거‘가 아닌 모두에게 공평한 ’추첨‘으로 선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치’ 의미의 본래적 민주주의는, 그것의 현실적 가능여부를 떠나, 현재의 민주정치와 지방자치에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 지배하지도, 실질적으로 번갈아 지배하지도, 추첨으로 대표를 선출하지도 않는다. 

 

 전국의 수준에서건 지방의 수준에서건, ‘선거’는 이제 정치의 유일한 게임방식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 ‘선거’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인가? 버나드 마넹(Bernard Manin) 교수는 <선거는 민주적인가>라는 저서에서, 선거는 역사적으로 反민주적 정치기획이었다는 사실을 규명한다. 우리의 상식과 정반대로, 고대 아테네 시대부터 19세기 초반까지의 모든 정치 사상가들은 선거를 귀족적?反민주적제도로 인식하였고, 근대의 정치인들도 오히려 민주주의를 억압?통제하기 위하여 선거제도를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사회의 최상위층이 정치를 전유하는 것이 사회 정의와 전체 이익에 부합한다는 전제하에, 인민들로부터 분출하는 정치참여 욕구를 억누르고 기만하기 위하여, 정치제도적?사회경제적 제약을 정당하게 부과할 수 있는 선거제도를 도입하여, 그 최상위층만이 대표와 지배자가 될 수 있는 정치질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근대와 달리 모든 인민들의 ‘보통선거권’이 정립된 현대는 어떠할까? 선거제도를 통하여 선출된 우리의 대표와 그들에 의하여 임명된 장관, 기관장 등 고위 공직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그들의 8-90%는 어린 시절부터 부유하고 자라고, 서울의 명문대나 외국대학을 졸업하고, 부모로부터 수십억 원의 재산을 세습 받고, 그렇기에 사회에 대하여 지극히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중?노년의 남성들이다. 그러면 실제 우리 사회에서 맞닥뜨리는 일반 시민들의 8-90%도 바로 그러한 사람들인가? 의도치 않은 우연한 결과일까? 정치적 평등이라는 헌법적 선언이 있지만, 과연 일반 회사원?자영업자?비정규직?가정주부들이 개인적 생존의 문제를 팽개치고 수억 원에 이르는 선거비용을 감당하면서 일반 시민의 대표로 나설 수 있을까? 

  그러면 현대의 우리는 본래적 의미의 민주주의인 인민자치를 달성할 수 있을까? 혹은 본래적으로 귀족적인 선거제도를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기획으로 전환시킬 수 없을까? 참여 민주주의론자들은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의 제분야에 고대 아테네적 자치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하고, 정당 민주주의론자들은 진보정당을 통하여 사회적 약자의 힘을 모아야만 정치에 민주성을 강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추첨 민주주의론자들은 추첨제를 도입하여 사회계층구조에 상응하는 대표체제를 구성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거=민주주의’ 라는 도식에 포획된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의 수준에서는 이러한 대안들은 너무나 멀리 있다. 세계의 수많은 진보적 정치학자들이 현재의 선거에 의한 대의정체의 反민주성, 과두성과 필연적인 상층계급 편향성, 구조적 부패사슬을 예리하게 비판하지만, 그 누구도 현실적으로 적실성을 갖춘 대안의 민주주의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지금의 지방자치에 자치가 없고, 선거가 역사적으로 反민주적 정치기획이었거나, 지방선거가 현실적으로 지방토호들의 동심원적 순환 놀이에 불과하더라도, 우리는 6월 4일 투표장으로 가야 한다. 희망적 대안과 최선의 정치인이 없더라도 말이다. 단지 차악(次惡)의 민주주의를 선택하거나 그 민주주의의 퇴행을 막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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