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주 희(침례신학대 교수)

여가(餘暇,leisure)는 일 안해도 되는 시간이다. 단지 안하는 시간을 넘어 하고 싶은 것을 원껏 할 수 있는 시간이다. 방해 없이 몰입하고, 간섭 없이 쉴 수 있다. 의무로 일 안하고, 빈둥거릴 수도 있다. 생계 위해 돈 벌고, 승진 취직 위해 공부하고, 학점 따기 위해 책 보는 스트레스가 없는 시간이다. 살아가자면 꼭 필요한 아이 돌보고 잠자고 일하고 밥 지어먹는 시간을 뺀 나머지, 직장 사회의 의무에서 벗어나 개인이 선택해서 쓸 수 있는 자유 시간을 여가라고 한다. 물론 이 시간은 ‘혼자’ 이거나 ‘도피’ 범주가 아니라 ‘참여’의 범주에 놓여야 하는 시간이다.

 사회 지배층 아닌 평범한 이들이 여가를 누린 역사는 오래 되지 않았다. 전에는 생계노동을 노예들에게 맡길 수 있는 귀족들만 학문을 논하고 예술을 즐기며 정치같은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현대는 노동시간이 줄어들어서 시간 여유 있는 유한 대중이 많은 매스(mass:대중)와 레저(leisure:여가)의 시대가 되었다. 노동시간은 줄어들었지만 단순작업을 반복하거나 강도 높은 정신노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신체 허약과 정신 피로라는 새로운 복병 앞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여가에 정신 피로를 적절하게 해소하고 허약한 신체를 단련해야 하는 필요가 생겨났다. 직업, 직장, 학습과 관련된 일이 사회적 성공과 물질 보상의 차원과 관계 깊다면, 여가의 취미활동이나 자기충족적인 추구들은 심리적 만족, 의미의 발견이라는 가치 보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역으로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일들의 의미를 더 충일하게 만들어 내기도 한다. 여가는 단지 먹고 쉬는 것이 아니라 채워나가는 시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떻게 놀고, 쉬고, 충전하고, 참여하면 좋을까. 

개인 차원에서 여가 활동으로 성취나 보람을 찾으려면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거나 하다가 멈춘 일, 미치고 싶은 일을 심화하는 것이 좋다. 몸을 움직이며 일하는 이는 여가에 머리를 깨울 독서나 공부를 하고, 신체 활동이 없는 이는 몸을 쓰는 일을 여가에 하는 것이다. 사는 게 무의미하도록 정신이 소진된 사람은 예술의 아름다움에 젖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신체적 허약은 신체를 움직이며 단련해 나가야 하고, 정신적 피로는 의미있는 가치들로 채워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비스듬히 누워 TV채널 이리저리 돌리며 한 세월 보내기를 휴식의 전부로 삼을 수는 없으니 수목원이라도 다녀오고, 맛있게 저녁 먹은 뒤 가족과 동네라도 한 바퀴 도는 일, 장이라도 함께 보아서 재료 정리하는 일들로 가사에 참여하는 것, 아이와 자전거 타기라도 하는 것이다. 책을 사서 뒷장에 날짜를 적고 읽기 시작하는 일, 방치해 놓은 묵은 사진들을 정리하는 일도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여가활동이다.

 늘 집에 있는 이는 떠나는 여가가 필요하고, 집에 있고 싶은 이는 차분히 집 안에서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 매일 밥하고 설거지 하는 틈틈이 절실한 사랑 시라도 한 편 외우는 일, 함께 모이면 할 일이 없다는 탄식 말고 하루 쯤 온가족이 모여 신약전서를 독파하고 기념하는 세레모니를 하는 가치 공유의 여가 방법을 형편대로 찾으면 좋을 것이다.

 


 사회적인 차원의 여가활동도 중요한데 개인으로는 추구하기 어려운 공동선에 참여하는 일이기 때문에 성취감이나 소속감이 높다. 생활에 필수적인 의무들 때문에 잘 하지 못했던 유익하고 보람을 찾을 수 있는 활동이 필요하다. 몸은 피곤하지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들, 보람이 있기 때문에 또 하고 싶어지는 일들에 참여하는 것이다. 많이 권장되는 것이 NGO활동, 봉사활동들이다. 대체로 신앙인들은 사회적인 차원의 여가는 교회를 중심으로 잘 보내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의 번잡한 일들을 멈추고 예배 공동체에 참여하며, 어려운 가정들을 심방하며, 교회 공동체에 필요한 일들에 헌신하고 봉사하기 때문이다. 또 교회 공동체를 넘어 교회 밖까지 확산되어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들도 적극적으로 해나가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본말이 전도되면 위험하다. 여가를 위해 다른 가치들을 무시하는 일들, 가령 여행을 위해 삶의 현장에서 책임질 일을 등한히 하거나 돌봄을 호소하는 노약자인 가족 보다 규칙적 취미생활이 더 중요해지는 단계, 사회 봉사를 하느라 집안 식구들과는 좀체 시간을 내지 못하는 일들은 여가가 본업이 된 경우이므로 조정해야 한다. 돈 자체가 목표이면 속물이 되듯이 여가 자체가 목표가 되는 것은 건전하지 않은 것이다. 주님이 주신 생명과 평안을 풍족히 하는 좋은 경험들을 쌓고 누리는 시간이 여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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