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공증인, 변호사)

지난 25일은 법의 날이었다. 세월호 참사로 기념식을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기도 하였지만, 사실 예전에도 시민들은 법의 날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필자는 매년 이 날이 되면 지역 언론에 법과 법치주의의 의미, 유래, 그리고 그것의 문제점 등에 대하여 칼럼을 기고하여 왔다. 법으로 밥 먹고 사는 입장이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민들이 적어도 단 하루만이라도 법과 법치주의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취지에서 그래 왔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법은 정의이고, 법의 준수는 공동체 전체이익을 보전을 위한 철칙이며, 법치주의는 민주주의와 거의 동의어인 것처럼 배워왔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허구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과장되고 왜곡된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법, 준법, 법치주의 개념은 고대 아테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 전체이익을 위한 정의로서의 법, 그러한 법의 지배와 준수의 당위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부터도 그러한 관념은 도전을 받았던 모양이다.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지적으로 하찮고 편협한 성격을 가진 대화상대로 묘사되고 있는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정의관을 반박하며,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법을 제정하고……그들은 그러한 법을 피지배자들에게도 옳은 정의라고 선언하고, 이를 어긴 자를 정의를 위반한 범죄자로 처벌한다. 지배계급의 이익 그리고 이를 대변하는 것이 정의와 법으로 통용되는 것일 뿐이다”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의사 선장 양치기에 비유하면서, ‘참된’ 의사 선장 양치기는 자신들의 이익이 아니라 그 대상인 환자 선원 양들의 이익을 위한다며, 통치자와 법은 지배계급의 이익이 아니라 오히려 피지배계급의 이익을 돌본다고 반박한다.

 양자간의 대화는 계속 공전되고 서로간에 비아냥으로 흐르기도 하는데, 양자가 대립되는 근본이유는 소크라테스는 ‘이상’을, 트라시마코스는 ‘현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라시마코스가 현실을 말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법과 정의는 사회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사회규범 내지 기준이고, 준법과 처벌은 그러한 규범과 기준을 현실에서 관철시키는 과정이기에, 법치주의는 피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한 민주주의에 오히려 역행하기 쉽다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것 같다. 소크라테스가 ‘참된’이라는 접두어를 붙인 것도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실제 역사에서도 법 준법 법치주의는 민주주의를 억압하기 위하여 등장하였다. 고대 아테네의 위대한 철학자들을 비롯하여 근대 자유주의 사상가인 로크, 몽테스키외, 그리고 제임스 메디슨과 같은 미국 헌법의 아버지들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라는 말은 무지한 대중에 의한 전제정치의 공포를 상징하는 단어로 받아들여졌고, 그러한 대중의 정치참여를 배제하고 일정한 재산과 교양을 갖춘 사회지배계급만이 정치적 지배자가 되는 정치체제를 수립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때 법?준법?법치주의는 그러한 그들의 정치적 특권, 사회경제적 지위, 사적 재산을 보호하는 강권적 보루이자 이데올로기 담론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과두적 정치질서가 무너지고 모두에게 정치참여의 권리가 부여된 현대 민주주의에서도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는 자주 상충된다. 2008년 촛불집회, 노동분규 현장, 철거민투쟁 현장에서 보듯,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에 대하여, 떼법이라고 비난하고 법질서수호나 구속수사원칙 등으로 엄포를 놓는 것은, 군사정권이 아닌 민주화된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특히 20세기 말부터 신자유주의가 전세계적으로 득세를 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빈발하고 있다.

 

 법?법치주의는 정의?민주주의와 동행할 수도 있고, 오히려 이에 역행하며 다수시민의 민주적 요구를 억압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법의 존엄성을 찬양하고 시민의 준법의식을 고양’하고자 제정되었다는 법의 날에, 오히려 우리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도록 우리 법이 정의와 민주주의를 담고 있는가, 아직도 不정의를 확장하고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수많은 법이 있지 않은가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