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림

탁상 달력을 뜯습니다 꽃들이 울컥울컥 쏟아집니다 한해살
이를 끝낸 생명들이 종이 낱장을 붙들고 마지막 제 생을 터뜨
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닥에 흩어진 결혼식, 도시가스 검침, 동
창회, 정기건강검진, 둘째 생일, 노모의 기제사, 부활절, 클린
세탁물 찾는 날, 날, 날들이 빨강, 노랑, 보라꽃을 그득 피위대
고 있었던 겁니다

날짜들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꽃이었다는 것을 한 해를 다
보내고서야 알았습니다 빈 칸마다 모종들이 쑥쑥 자라고 있
었던 것입니다

수명이 끝난 붉고 노란 꽃들을 누르자 꽃물 든 손바닥에서
눈물처럼 재채기처럼 이야기가 탁탁 터 집니다 색이 번져서
어떤 꽃이 봄꽃인지 가을꽃인지 몰라도 좋습니다

한 해가 다 저물도록 꽃이 되지 못한 내가 난쟁이처럼 줄레
줄레 따라갑니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