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희 팔(논설위원, 소설가)

 성보 씨가 그의 재당질부(칠촌조카며느리)인 성마루댁을 찾아왔다. “여보게 질부, 조카는 어디 갔는가?” “예, 그 속도 속이 아닝께 발써 며칠째 날만 새면 나가서 밤에나 들어와유. 보나마마 또 장터 술집에서 막걸리나 퍼대고 있을 거여유.” “왜 안 그럴껴 내도 그 속 다 알구 말구지 미칠일이제.” “숙부님께는 외람스럽지만, 자식 잃으면 가슴에 묻는다더니, 첫애 짼 낳자마자 잃었으니 곧 잊을 수 있었는데 이번 녀석은 한창 재롱떠는 세 살배기인데다 잔병치레 없는 생때같던 놈이라 영 가슴 깊숙이에서 좀체 떠나지를 않네유.” “말 말게, 난 자그마치 일곱을 잃지 않았는가. 하긴 일곱을 잃으나 둘을 잃으나 가슴을 허비기는 매 마찬가지만. 이제 자네도 그만 마음 추스르고 나하고 같이 가세!” “어디를유?” “가랫말 안 박사네.” “거긴 왜유?” “따라만 와, 쌀 서 말만 이구.” “시어머님 계신디유.” “밭에 나간다구 햐, 내 먼저 나가서 동구 밖에서 기다릴껴.”

 -성보 씨가 열아홉에 장가들어 애를 낳기 시작하는데, 첫째 둘째까지는 돌을 못 넘기고 홍역으로 잃고, 셋째 넷째 계집애는 돌은 넘겼으나 돌림병으로 잃고, 다섯째 사내놈은 식구들 모르는 사이 혼자 아장아장 걸어 나갔다가 동네웅덩이에 빠져 죽고, 여섯째도 사내앤데 네 살 먹은 놈이 괜히 시름시름 앓더니 갖은 푸닥거리를 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일곱째는 계집애다. 두 살로 접어든 애가 무엇에 놀랐는지 처음엔 조그만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면서 악을 쓰며 울더니 나중엔 몸에 경련을 일으켜 그럴 때마다 읍내의원을 찾았으나 백약처방이 효험이 없어 이 애마저 잃었다. 이러는 사이 두 내외 오십 줄에 접어드니 안에선 이제 단산이 되고 말았다. 이에 안사람이 더 성화다. “일찍 홀로돼 대 이을 손주를 간절히 바라시는 어머님 때문에라도 당신 이제라도 새장가를 가야겠소.” 그러더니 정말로 친정으로 가서 친정동네 사고무친의 삼십 초반여인을 데리고 왔다. 그러니 안사람 속이 속이겠는가!

 이 무렵 동네 동갑내기 친구가 찾아왔다. “여보게 친구, 생일을 한번 갈아보게.” “느닷없이 그게 무슨 소리여?” “그러면 자식 보전하는 데 효험이 있다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타고난 사주팔자를 어떻게 가는가?” “사주 여덟 자 중, 생일 두 자만 고쳐보란 말일세.” “글쎄 그게 말이 되냐구. 사람의 팔자란 생일 두 글자까지 들어가야 되는 건데, 그래서 여덟 글자 팔자(八字)인데 태어날 때 운명적으로 타고 난 생일을 임의로 고친다면 그건 이미 사람의 팔자가 아니지. 말도 있지 않은가 ‘팔자 도망은 못한다.’구.” “자네가 정 그렇게 말한다면, ‘팔자 고친다’는 말도 있어. 여인네는 모름지기 운명적으로 한 지아비와 해로해야 하지만 사별 후 개가해서 운명을 바꾼다는 말 아닌가.  또 ‘팔자는 길들이기로 간다.’ 는 말도 있어. 습관이 마침내는 천성이 돼서 사람의 일생을 좌우한다는 말 아닌가. 그러니 여러 말 말고 나하고 같이 가서 자네 생일을 한번 바꿔보세. 좋은 게 좋지 않은가. 가랫말 안박사집 양반이 그렇게도 생일을 잘 보아 고쳐준다네.” 성보 씨는 친구의 마음쓰임이 고맙고 좋은 게 좋다는 생각으로 안박사집에 가서 생일을 바꿨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성보 씬, 둘째아낙에게서 세 사내 소생을 보았는데 모두 무탈하게 자라 큰애는 올봄에 장가를 갔다. -

 


  성마루댁은 재당숙이 시킨 대로 시어머니 몰래 쌀 서 말을 자루에 담아 이고 재당숙을 따라 안박사집으로 갔다. 생일을 말하자 안박사는, 두꺼운 책갈피를 돋보기를 대고 뒤척여 보면서 열 손가락으로 한참을 셈하더니, “열이렛날이라고 했지요. 열닷새로 고치시오. 본 생일날짜는 그대로 두고 평소의 생일치례나 생일 모임, 생일잔치 같은 일은 이 날로 하시오. 그간의 팔자땜이 될 것이외다.” 성마루댁은 이후 일러준 그대로 행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 후 낳은 아들형제는 별일 없이 자랐고 지금은 손자손녀까지 보았는데 이걸 다 갈은 생일의 효험으로 믿고 있다.

 요즘 성마루 할머니는 연일 텔레비전에 중점적으로 나오는 진도해상의 배 사고를 보면서 여간 끌탕이 아니다. 같이 안타까워하는 손녀들 앞에서 할머니가 중얼거린다. ‘요즘 생일치례는 모두들 자식들 편안한 날로 고쳐 잡아 당겨서 하고 있는데도 저러하다니 쯧쯧’ “할머니 지금 뭐라시는 거예요?” “아, 아, 아무것도 아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학상들이 하도 딱해서 하는 소리다.” 그리고 두 손을 모은다. ‘하느님, 부처님, 가신님들은 천당과 극락으로 보내주시고 아직 생사 모르는 사람들 어서 생환토록 해 주시옵소서. 이 늙은이 이렇게 두 손 모아 기도하고, 두 손 비벼 빌어 올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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