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천호 목사의 십자가를 진 신석구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신석구 목사는 1921년 11월 4일 금요일 아침 공덕리 경성감옥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2년 8개월 978일간의 징역살이를 한 것이다. 
출옥한 사람들은 전에 살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신석구 목사는 갈 곳이 없었다. 감옥에 잡혀 들어가기 전 담임하였던 수표교교회는 이미 다른 목사가 부임해서 2년 넘게 목회를 하고 있었다. 이같이 갈 곳에 없는 출옥 목회자를 위해 남감리교회에서는 11월 15일 특별 파송을 시행하여 신석구 목사를 원산 상리교회로 파송하였고, 그는 가족을 이끌고 원산으로 향했다. 
3·1 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고 난 후 민족대표라는 유명세를 타고 교회 본부나 기관에서 활약하면서 유명한 인사가 된 친구 목사와 달리 신석구 목사는 교통이 불편한 충청도, 강원도, 평안도 등 시골의 작은 교회를 돌면서 무명목사로 남았다. 
그는 1년에 한 번 꼴로 이사하면서 가족의 상계마저 걱정하는 가난한 목사의 삶이었지만 그것을 통해 청빈과 순종의 삶을 실천하였다.
감옥의 훈련을 겪으면서 섬김과 사랑으로 무장된 그의 삶과 목회와 신학은 감동적인 설교와 문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는 여러 교회에서 부흥회와 특별예배 설교의 부탁을 받았다. 
1922년 1월 31일 서울 자교교회에서 ‘오인(吾人)의 최급무(最急務)’란 제목으로 설교한 것과 2월 3일 종교교회에서 ‘시대의 참 요구’란 제목으로 특별강연한 것은 동아일보에 소개될 정도였다. 
그의 설교는 교회뿐 아니라 일반사회에서도 명강연으로 인식되어 설교 문이나 논문이 신문과 잡지에 종종 실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목회현장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다른 이들은 파송 받은 교회에서 보통 4년은 목회하였지만 보통 1년에 한 번씩 임지를 옮겨야 했고, 서울에서 목회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활동영역을 제한하려는 정치적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옥고를 치르고 난 그에게서 더욱 강화된 민족 신앙 의지가 설교나 강연에서 배어 나왔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야기했고, 그 지름길은 국민 한 사람을 회개시켜 국민의 의무를 행하도록 하는 것이라 하였다. 
3·1 운동의 전과자인 그에게는 항상 감시가 따라 그의 행적은 일일이 경찰 당국에 보고되어 춘천에서 목회할 때는 경찰서에 불려가 행적에 관한 심문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혐의를 찾으려는 경찰의 집요한 질문에 거짓말하고 풀려났지만, 거짓말 하였다는 것이 양심의 가책이 되어 기도도 안 되고 평안히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결국, 하나님 앞에 자복기도 한 후 다시 감옥에 갈 각오로 경찰서에 찾아가 전날 진술에서 거짓으로 증언한 것이 있다고 고백하여, 그를 담당했던 고등계 형사는 오히려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였다. 그는 여전히 총독부 관할의 주요감시 인물이었다.  
그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목회자였지만, 가족에게는 못난 가장이었다. 하나님 앞에 자기 지식과 재능을 자랑하지 않는 못난이가 되자는 생활철학의 삶으로 일관하였다. 
그리고 사람 앞에서도 못난이가 되고자 하였다. 남들이 우러러보는 3·1 운동 민족대표 출신이고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설교자로 추앙받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시골교회에서 남을 섬기며 봉사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주어진 목회의 길을 가고 있었다. 
교회 내에서 조금만 정치를 하면 큰 교회, 도시교회로 파송 받아 나갈 수 있었지만 시골교회로만 파송하는 교회의 명령에 복종하였고, 유명무실한 교인들은 과감하게 정리하여 보고하였다. 
아들이 죽었음에도 교회일 때문에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던 아버지였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못난이로 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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