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자식들이 가슴에 달아준 카네이션을 훈장처럼 달고 당당히 거리를 활보하는 노인들을 쉽게 볼 수 있었던 42회 ‘어버이 날’이었다. 또, ‘세월호’ 참사로 부모와 아들, 딸을 읽은 유가족들에겐 슬픔이 더해지는 날이기도 했다.

일부에선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의 은혜를 모를 리가 없는데 굳이 기념일로 정할 필요까지 있느냐”는 말도 있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핵가족화 된 한국은 이미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고 독거노인의 가구 수가 100만을 넘어가고 있다. 궁핍한 생활과 질병, 우울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이젠 새롭지 않다. 또, 사망한지 수개월이 지나서야 발견되는 독거노인에 대한 무관심이 사회문제로 부각 되고 있다.
더욱이 이들 대부분의 노인들은 자식들이 있었음에도 오랜 기간 부모를 전혀 보살피지 않아 생긴 사고로 큰 충격과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모르는 사람도 힘들어하거나 아파보이면 걱정하고 돕는 것이 일반적인 한국정서일 텐데 하물며 생활이 어렵다는 핑계로 부모를 등진다는 것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될 일일 것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오래된 기억들을 지워나가며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절대 잊혀 져도, 잊어서도 안 될 것이 이 세상에 날 있게 해준 부모의 은혜일 것이다. 태어나서 성장할 때 까지 아니 죽을 때 까지도 자식걱정을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그러나 사랑에도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일까? ‘내리사랑’은 쉽고, ‘올리사랑’은 매우 어렵다. 우린 자식에 대한 ‘내리사랑’에는 익숙하고 당연시된 반면 부모에 대한 ‘올리사랑’에는 왠지 서툴고 어색한 생각마저 든다. 바쁜 일상 중에 부모에게 가끔 들리거나 전화로 안부를 물을 때도 다정스런 말보단 퉁명스런 말이 무의식적으로 나와 버리곤 한다.

지난 달, 한 지인이 “어머니께 휴대전화 사용법을 서너 번 설명하다 답답하고 짜증이나 화를 내곤 뒤돌아섰는데 며칠 뒤 자신의 딸이 같은 질문을 7번 넘게 해도 그저 사랑스러워 계속 설명해주는 자신을 발견하곤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났다”며 “낳아주고 키워준 어머니께 보답은커녕 핀잔과 화를 내는 자신이 괘씸하고 한심했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우린 사랑의 표현에 서툴고 부모님이 늘 함께할 것 같은 착각 속에 살고 있다.

퇴근 후 어린 아들 녀석과 눈이 마주칠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눈에 넣어도 안 아프고 목숨과 맞바꿔도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문득, “나도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이런 생각을 했겠지”라는 생각에 숙연한 마음마저 든다. 분명 그랬을 것이기에.

우린 일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수시로 안부를 묻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눈다. 그러나 부모에겐 기념일이나 특별한 날에만 형식적인 연락과 식사대접을 하는 것이 전부다. 
모든 것엔 때가 있다. 부모에게 가장 큰 선물은 비싼 옷과 음식이 아니다.
자식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과 함께 식사하며 가족의 추억을 되 새기는 지극히 평범한 모습을 바라는 것이다.
이젠 자식을 키우는 자식으로 부모로부터 받은 내리사랑의 빚을 올려 갚아야 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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