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공증인, 변호사)
달력을 보니, 지난 10일은 ‘유권자의 날’이었고 이번 주가 ‘유권자 주간’이다. 기념일에 기념주간까지 있는 것을 보니, ‘유권자’에 뭔가 대단한 이상을 부여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이상과 달리 우리 유권자의 ‘현실’은 암울하기 그지없다.
세계사적으로 본다면 신분?재산?학력 등에 따른 차별 없이 모든 성인이 유권자가 되는 민주주의가 도입된 것은 100여년전이었다. 그 이전의 100여년 동안(19세기)은 이러한 민주주의를 향한 인민들의 투쟁과 과두 지배엘리트들의 이에 대한 탄압의 역사였다. 사회의 0.1%에 불과한 당시의 지배엘리트들은, 자연귀족론(세습귀족이 아니라 재산?학력 등 후천적으로 획득한 일정 자격을 갖춘 상위계층만이 정치계급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담론), 수동적/능동적 시민론(모든 시민이 법의 보호를 받되, 일정 재산을 보유하고 세금을 납부하는 시민만이 정치적 권리를 갖는 것이 타당하다는 담론) 등을 동원하여, 모든 시민의 평등한 정치참여를 거부하였지만, 사실 그들의 근저에는 고대 희랍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시작된, 민주주의에 대한 원초적 공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단지 ‘수(數)’에 의한 산술적 평등에 의한 정치, 모든 시민들에게 동등한 정치참여권을 부여하는 민주주의를 도입한다면, 압도적 다수인 가난하고 무지한 자들은 그 수(표)로서, 부자들의 권리를 억압하고 그들의 재산을 강취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우려는 터무니없는 기우에 불과하였다. 하층계급은 정의와 정당성을 무시한 계급 이기주의에 흠씬 물든 사람들도 아니었고, 적어도 그들의 계급적 이해에 대한 인식과 의욕은 상층계급의 그것에 훨씬 못 미쳤다.
오히려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가 만개한 현대에도 우리는,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의 양산?재벌과 거대언론의 정치적 영향력 점증?사회경제적 상층계급과 연계된 정치적 부패의 점증 등, 경제적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고 사회계급질서는 점차 고착화되며, 사회경제적 약자는 점점 주변부로 밀려나고 그들이 물러난 정치와 공적부문에서 상층계급과 재벌 편향성은 더욱 강화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가난하고 억압받고 소외 된 사회적 약자들이 유권자가 되면, 민주정체는 제 스스로 작동하며 세상을 보다 평등하고 깨끗하고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은 단지 교과서적 원론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심지어 지금처럼 사회경제적 불평등 구조와 정치의 기득권 편향성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이용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현대정치의 이러한 대기업과 상층계급 편향적 질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현대정치에 보다 많은 평등함과 정의로움을 강제할 수 있을까? 누구는 시민들의 투표참여를 독려하고, 누구는 시민들의 정치적 각성을 촉구하고, 누구는 이상적인 자치공동체를 구상하고, 누구는 언론과 사법권력의 정치부패 감시기능의 강화를 주장한다. 그러나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이러한 주장과 노력은 결국은 실현 불가능한 도돌이표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는 우리도 경험적으로 터득하였다.
현대정치학의 최고 고전중 하나로 평가받는 ≪절반의 인민주권≫의 저자인 샤츠슈나이더(E. E. Schattschneider)는, 좌우를 막론하고 정당이 패악과 혁신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지금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정당’만이 희망이라고 말한다. 정치적 행위자인 ‘정당’을 통하여, 수백 가지로 분절되고 산개되어 있는 다수의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불만을 몇 개의 해결 가능한 정치적 의제로 만들어 내고 그 의제를 따라 그들을 통합하고 동원해낼 때만이, 그 ‘수’가 진정한 정치적 ‘힘’이 될 수 있고, 그럴 때만이 정치에 보다 평등함과 정의로움을 강제할 수 있고, 우리 유권자는 ‘절반의 주권자’가 아닌 ‘온전한 주권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수의 유권자는 투표용지를 들고 민주주의 거리를 이리 저리 방황하거나 또는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방향으로 이끌려갈 뿐이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조직화되지 못하고 그들의 의사와 불만이 정치적 의제로 현실화되지 못한다면 말이다. 그것이 유권자의 날에 유권자인 우리에게 샤츠가 경고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