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 여행길에서의 일이다. 계획엔 없었지만 앞의 일정이 당겨지는 바람에 시간을 메우기 위해 인근에서 공연 중인 원숭이 쇼 관람을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어릴 때 동네 서커스단을 통해 본 것은 기억이 까마득해 오랜만에 지난날을 반추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성 싶었다. 호기심에 가득 찬 우리 일행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입구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출입문 옆으로 쭉 이어진 벽에 붙은 대형 사진이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오늘 쇼의 주체인 어린 원숭이가 고운 레이스가 달린 블라우스로 단장하고 하얀 눈물이 똑똑 떨어질 듯 양손에는 이름 모를 흰색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있다. 어딘지 모를 곳을 응시한 채 슬픈 두 눈으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그 슬픈 눈동자 속에 감춰진 인간의 잔인성에 대항하지 못한 약한 자의 슬픔이 전해진다.
숙연한 마음도 잠시 안내자의 인솔을 받으며 우리는 공연장으로 들어섰다. 무대 중앙에 천연덕스러운 작은 원숭이는 열중쉬어 자세로 조련사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옴짝달싹 못한 채, 바짝 긴장한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러웠다. 조련사의 입에서 떨어지는 명령에 목숨 줄이 매달려 있는 위태하고 가녀린 생명- 뒤구르기, 외발걷기, 건너뛰기, 납작 엎드리기, 뒤로 자빠지기 등 고난도 곡예를 하기까지 숨은 고통과 상처를 생각하니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일지라도 측은지심이 생긴다. 타고난 자연 본능의 환경을 일탈해 어쩔 수 없는 생존으로 의욕상실과 무기력으로 그저 하루하루 숨 쉬며, 자본이 깔린 인간들의 욕심에 혹독한 훈련과 폭력으로 희생된 채 쇼하고 훈련하는 것만이 한 생명체의 존재 이유로 비춰져 슬프다.
얼마 전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누렁이가 몽둥이로 맞아서 안구가 적출되는 폭행이나 어린 여학생이 술에 취해 고양이를 창밖으로 던지는 무모한 행위를 보면서 그들이 겪는 고통이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희로애락의 감정은 사람이나 동물 모두 같은데 단지 표현하지 못하는 힘없는 존재라고 마구 학대한다는 것은 잔혹한 인간의 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동물들의 수난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다행히 최근에 동물의 기본적인 권리를 지켜주고자 동물보호법이 시행되고 있다고 하지만 법의 효력이 아직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어 안타깝다. 그나마 동물학대의 심각성이 수면 위로 떠올라 각성의 움직임이 보이는 것은 반길만한 일이다. 하지만 법 이전에 무엇보다 동물도 사람과 똑같은 생명체로 바라보는 눈과 그들을 품을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이 먼저가 아닐까.
우리는 아직도 춥고 어두운 응달의 긴 그림자에 가려 눈멀고 귀먹은 탓에 지금도 어딘가에 고통과 상처로 아파하는 무수한 생명체를 못보고 있는 건 아닐까. 그 목숨들이 이 세상 어느 구석에서 신음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관람을 마치고 나서는 발걸음이 한층 무거워진다. 신으로부터 평등하게 나누어 가진 생명들-그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서로의 가슴에 따뜻한 온기를 잃지 말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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