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배려와 포용 균형잡힌 전진의 중심이 됩시다

 
장석연 목사(71·전 청주서원경교회 담임목사)이제 세월호 참사의 불행을 가슴에 새기고 우리는 일어서야 한다며 세월호 참사(416) 2개월을 맞아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는 마디를 넘어 커가는 대나무처럼 마음을 더욱 단단하게 다져나갈 때라고도 말한다.
장 목사는 1990년 청주 서원경교회를 설립, 23년간 담임목사로 활동하다 지난해 말 은퇴한 원로 목사로 현재 청주시 흥덕구 복대로 1184101(삼일아파트)에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대담·정리=조아라 기자/ 사진=임동빈 차장>
 
마음의 폐허를 딛고 다시 일어섭시다.
 
우리는 경제개발기를 지나면서 중요한 사회 건설을 목표로 매진해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물질이나 외적 성과에 집착하는 풍토가 만들어졌지요. 자연히 본질이나 정신적 가치 같은 바탕은 소홀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위에 민주화의 격랑이 밀어닥쳤습니다. 인간에게 자유나 인권은 최고의 가치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내세운 방종이나 인권을 빙자한 이기주의를 방치하면 공동체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발전해 가는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근본이 얼마나 심하게 썩고 병들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대로는 이 사회의 미래가 없습니다. 속히 근본을 치유해서 바로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세월호 참사가 주는 교훈입니다.
참사 이후 온 국민이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과 땅이 무너지는 절망감에 빠져서 지내왔습니다. 정성을 다해 쌓은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 같은 허망함을 느꼈습니다. 숨겨 온 치부가 모두 드러나 버리는 것 같은 수치심을 느껴야 했습니다. 진정 온 국민이 직접 피해자요 동시에 가해자인 사건이었습니다. 온 국민이 심리적 상처를 치료받아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은 바로잡지 못하면 불행으로 끝나지만, 깨닫고 바로잡으면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우리는 일제 치하의 아픔과 절망을 새나라 건설의 계기로 바꿔낸 민족입니다. 6.25 전쟁의 상처를 국가 재건의 동력으로 승화시킨 민족입니다. 그것이 우리 한민족의 저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불행도 반성과 재기의 기회로 바꿔낼 것입니다. 대나무는 마디를 넘어 커가는 법입니다. 마디가 없다면 대나무는 이처럼 단단하지도 못할 것이고 쉽게 부러질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불행을 마디로 삼아 온 국민이 잿더미같은 심적 폐허를 딛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정신의 빈 곳을 다져 채웁시다. 왜곡된 가치관을 철저히 바로 잡아 밑바닥부터 다시 쌓아갑시다.
역사의 교훈을 간직하는 백성은 재기하고 망각하는 민족은 망합니다. 다시 일어서서 전화위복의 새날을 열어가는 것이 억울한 희생자들을 위하는 길이요, 유족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길이요, 민족의 새날을 열어가는 길입니다.
 
꿈과 열정과 도전은 젊은이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제 젊은 시절은 가난과 억압과 방황과 절망이 짓누르고 있던 1960년대 초였습니다. 권위주의 정권이 젊음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하고 있던 때였지요. 그래서 젊음이들의 가슴 속은 숙명적인 가난에 대한 절망감과 독재에 대한 분노와 억압에 대한 저항심이 항상 용광로 안의 쇳물처럼 끓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대학에 인문학을 존중하는 풍토가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은 부자가 되기 위한 법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을 했고 청빈(淸貧)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긍지도 갖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은 가난했지만 가슴에 꿈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타협과 굴종을 거부하는 정의감이 있었습니다. 군복을 물들여 입고, 점심을 굶어도 호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과 종점을 오가며 장난 삼아 아프리카나 남미를 여행하는 것처럼 이야기하곤 했고 무심천을 거닐며 파리의 세느강변을 거니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모험과 도전에 젊음을 바쳤습니다. 시골의 젊은이들은 꿈을 찾아 무작정 집을 떠났고, 어떤 젊은이들은 펜을 내려놓고 독일의 탄광이나 중동 건설 현장으로 달려가 부의 꿈을 일궈냈습니다. 그런 젊은이들의 무모한 도전으로 이뤄낸 것이 오늘의 풍요입니다.
건국대 부총장인 유태영 박사는 전북 임실에서 머슴 살던 소년이었습니다. 뒤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해 공고를 다니며 구두닦이를 하던 그는 덴마크 국왕에게 편지를 보내 왕실에 초청 받아 유학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나라에 새마을 운동을 일으켰지요. 이러한 젊은이들의 무모한 도전으로 이뤄낸 것이 오늘의 풍요입니다.
꿈과 열정과 도전은 젊은이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주어진 기회는 무한히 크고 넓습니다. 큰 꿈을 안고 세계로 가십시오. 세계에 새 날을 열어가세요.
 
잠시 삶에 쉼표를 찍어보세요.
 
사람의 가슴 속에는 누구에게나 텅 빈 공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 그 시원(始原)부터 감추어져 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빈 공간을 물질로 채워보려 했습니다. 그래서 소유에 집착했으나, 소유한 다음에도 공간이 메워지지 않았습니다. 성공으로, 명예나 출세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풍요한 사회가 되고, 세계 열방 앞에 기죽지 않는 꿈같은 날이 도래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가슴 속에 이 공간은 더욱 커졌고, 그래서 모두들 정신적인 허무와 빈곤을 호소합니다. 바쁘게 미친 듯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허망함도 감추지 못합니다. 이 공간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요?
잠시 삶에 쉼표를 찍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육체의 휴식이 아니라 마음이 게을러질 수 있는 여유입니다. 가끔 정신이 나태해질 수 있는 시간을 갖자는 말입니다. 서재에서는 공부만 할 것이 아니라 책상 위에 두 발을 얹고 한 시간 쯤 낮잠을 잘 수 있어야 합니다. 공장 굴뚝이 보이지 않는 산기슭에서 한 나절 구름을 보며 빈둥거릴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신체나 물질은 부유한데 정신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존재의 본질을 외면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살다가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물질에 매여 사는 사람은 그 엄연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합니다.
용감하게 죽음을 직시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거울을 보며 자기가 죽음 앞의 존재임을 선언하고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편협하거나 오만하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노을이 질 때 해는 가장 아름답습니다.
 
충북의 노인과 청소년 자살률은 전국 최상위권입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는 먼저 관점의 전환이 요구됩니다. 이번 선거에 진보적 경향의 인물들이 교육감에 대거 당선되었습니다. 이는 그러한 상황의 치유를 요구하는 학부모의 갈망이 담겨 있을 것으로 봅니다. 내려다보고 이끌어가는 교육 관점을 고쳐야 합니다. 아이들의 곁에 서서 함께 고민하고 아파하며 동행하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노인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져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여가 대책이나 연금 지급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을 할 수 없습니다. 2010년 기준 1000명당 노인부양인구 비율은 일본이 568, 한국은 366명입니다. 우리도 곧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게 될 것입니다. 부양인구비율을 낮추는 노력이 절실한 때입니다. 싱가폴처럼 우리도 외국인 대상 장학금을 늘리고 정착을 장려해서 일하는 노동인구를 늘려갈 필요가 있습니다. 또 지속적으로 자녀 양육비와 교육비를 지원해 출산을 독려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노인들이 품위 있는 노년을 보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생계비를 지원해 가족들이 부양의 부담을 덜도록 하고 일자리를 창출해 보람을 갖게 해 드려야 합니다. 노인 일자리는 쉬운 일이 아니라 본인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장수지역인 일본의 오키나와에서는 은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도 자연스럽게 하던 일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흔이 넘은 노인이 물고기를 잡아 오면 마을 사람들은 노인이 잡은 것을 먼저 팔아주는 식으로 도와주지요. 작고 사소하지만 본인이 관심을 가진 일을 계속 하도록 하면 좋을 것입니다. 해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노을이 질 때이지요. 노인들이 삶을 마무리할 때 이와 같은 존엄함과 장엄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충청이 굴기해야 온 나라가 일어섭니다.
 
충청인의 민심이 전국 민심의 바로메터라고 합니다. 이를 중간지대의 특성으로 폄하하기도 합니다. 충청인은 자기 주장이나 개성이 강하지 않아 민심이 풍향계처럼 전체를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지리적으로 보십시오. 충청은 반도의 중심축입니다. 충청의 민심이 다른 지역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이 충청의 민심을 반영하는 것 아닐까요?
축이 조금만 꺾여도 전체의 방향이 틀어집니다. 중심이 반듯해야 바로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충청이 굴기해야 전국이 일어섭니다. 이는 우리의 무거운 책무이기도 합니다. 충청이 중심을 잡아줘야 나라가 바로 나갑니다. 우리가 균형의 중심이 됩시다. 배려와 포용의 중심이 됩시다. 조화와 전진의 중심이 됩시다. 그럴 때 우리나라가 바로 나아가는 미래가 열릴 것입니다.
 
장석연 목사는
19431124일 충북 진천 출생. 청주대 국어국문학과(1968),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1970), 국문학박사(충남대, 1986). 장로회대전신학교(1990), 장로회신학대학원 졸(1995), 목회학박사(맥코믹. 장신대공동학위과정, 2004). 청주대 인문대 강사, 인문대 조교수, 인문대 부교수(1972~1989) 청주 서원경교회 담임목사(1990~2013) 농촌목회연구원 회장, 선교기금누리사랑 회장(2013~현재) △☏043-234-3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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