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기 (충북학생교육문화원장)

사추기(思秋期)를 맞는 것 같다. 그전 같으면 수없이 쏟아지는 많은 뉴스도 금방금방 소화시키며 잊을 건 잊고 챙길 건 챙겼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작은 일이 작은 일 같아 보이질 않고, 큰일이 큰일로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나이 탓이라고 하기는 환갑도 안 된 어린(?) 놈이 건방진 이야기다.
아이들이 적어 큰일이다. 아이들은 내게 평생 밥 벌어 먹을 수 있게 해 준 고객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30여 년 전 둘만 낳아도 나라에 불충(不忠)한다고 으름장 놓던 중앙의 높은 분들이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 직장에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다.
우리 원(院)에서 근무하면 임신, 출산하는 여직원들이 많다는 것이다. 임신이 안 되어 걱정하던 직원들이나 임신을 원치 않던 직원들도 아이를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 건물이 들어서기 전 마을 이름 때문에 그렇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도 믿게 된다.
이 사소한(?) 일에 원장으로서 임신, 출산 직원들을 불러 함께 식사를 하며 격려하는 자리를 갖기도 했다.
아이 낳는 게 애국하는 길이라며, 둘만 더 낳으면 금방 사무관 승진시켜 준다는 공약(空約)까지 남발하면서 말이다.
이런 아이 낳는 ‘작은일’에는 집착하면서 정작 ‘큰일’에는 무덤덤한 자신이 이상스럽다.
방송에선 무슨 파(派) 종교 지도자를 잡네, 못잡네 난리고, 신문에선 고위 공직후보자의 말과 글 때문에 시끄럽다.
그런데도 난 직원들 아이 낳는 일에 더 관심이 있으니, 인생 4/4분기에 접어든 사추기가 틀림없는 것 같다.
평소 생각을 많이 하는 친구가 글을 보내 왔다. 이어령 교수의 ‘좋은 글’로 인터넷에 널리 나돈다.
제목은 ‘나에게 이야기하기’이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이 글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몇 줄만 옮겨 본다.
‘너무 잘 하려 하지 말라 하네. 이미 살고 있음이 이긴 것이므로. 너무 고집 부리지 말라하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늘 변하는 것이므로. 너무 욕심 부리지 말라 하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치 않으므로. 너무 연연해하지 말라 하네.... 너무 뒤돌아보지 말라 하네.... 너무 받으려 하지 말라 하네.... 너무 조급해 하지 말라 하네....’
아이 낳는 것 같은 사소한 일에 집착하고 신문, 방송의 큰 기사에는 무덤덤한 사추기에, 이 글을 읽는 마음은 착잡하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했던가. 구절구절이 내게 하는 말로 들린다.
너무 잘 하려 하여 질시를 받았다. 고집 부려 남의 가슴을 아프게 했고, 욕심 부려 더 큰 것을 잃은 일도 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바람에 새 것의 소중함을 뒤늦게 알았다. 지난 일로 후회만 하다가 눈앞에 다가와 있는 중요한 일을 놓쳐 버렸다. 남에게 받는 맛만 즐기다보니 베풀고 주는 기쁨을 뒤늦게야 알았다. 천천히 가도 될 길인데 아직도 마음이 조급하다.
지난 4월 갑자기 세상을 뒤흔들어 놓은 세월호의 비극. 아직도 그 여파는 곳곳에 남아 있고 언제까지 갈지 모른다.
6월 국민의 선택은 끝났지만, 진 자가 평상을 회복하기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이긴 자도 승리의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분위기는 아직은 아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상태가 지속될지 걱정이다.
아이도 많이 낳아야 하고, 유ㅇㅇ이라는 사람도 하루속히 잡아야 한다. 월드컵 축구도 보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도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누구든 ‘자신에게 이야기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평상심을 되찾는 일이다.
공직자, 기업인, 선생님, 언론인도 그렇고 특히 정치한다는 분들은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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