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논설위원 / 시인)

허겁지겁 볼일을 마치고 아파트 현관문을 연다. 마음만 급했지 번호 키가  삐- 소리를 내며 한 번에 열리지 않는다. 문을 열자마자 먼저 베란다 쪽을 본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실루엣이 눈에 들어온다. 웃자란 벤자민 잎사귀에 반쯤 가려진 채 엄마는 미풍에 가지인양 흔들리고 있다. 그랬다. 베란다는 엄마에게 혼자 있을 때 외부와 소통하는 유일한 장소다.

시장바구니를 내려놓으며 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실루엣의 주인공은 80대 후반의 혈관성치매를 앓고 있는 엄마다. 이웃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는 우리들의 엄마다.

세월 호 참사 현장이 생중계되고 있는 TV 앞에서 엄마는 웃고 있다.

잠수부들이 실종자 구조를 위해 첨벙, 첨벙 바다 속으로 뛰어들 때마다 환한 미소가 얼굴가득 번진다. 엄마는 60년 전으로 돌아가 첨벙대며 물장구치고 있는 어린 아들을 바라다보고 있는 중이다. 브라질월드컵의 요란한 중계도 엄마에게는 지지배배 종달새 울음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엄마가 거실바닥에 등을 붙인다. 거실은 이내 한 여름 솔솔 바람 부는 둥구나무 침상이 된다. 낮잠이 스르르 밀려오는 가운데 실내 가득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차오르기 시작한다. 다급한 외침과 함께 주방으로 달려가는 딸의 모습과 거실에 누워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는 엄마가 오버랩 되고 있다. 냄비가 녹아내린 주방의 자욱한 연기 속에서 딸은 망연자실 털썩 주저앉아 훌쩍거리고 있다. 엄마를 믿고 잠깐 자리를 비운 것이 화근이 되었다. 엄마는 ‘생각 중’이다. 아주 오래된 추억 속을 거닐며.

 

휴대폰에 낯선 부재중 전화번호가 찍힌다. 경비실 확인전화다. 집을 못 찾아 헤매고 있는 할머니가 있는데 혹시나 해서. 맞다. 엄마다. 사연인즉 내과에 다녀온다는 딸을 위해 약을 사러 나왔다가 길을 잃었다고. 상처에 바르면 흉터 없이 깨끗하게 낫는다는 유명 브랜드의 외용연고를 엄마는 평소에도 내복약으로 두루 쓰고 있다. 딸이 당신 때문에 탈이 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외용연고를 한사코 먹으라고 권한다. “어여, 의사말만 듣지 말고 이놈 미지근한 물에 타서 오물오물 삼키면 금방 괜찮아져.” 엄마가 오십대 딸에게 건네는 확신에 찬 처방전이다.

 

1993년 제정된 국제질병분류의 수정기준에 의하면 ‘치매’는 만성 혹은 진행성 뇌의 기질적 병변에 의해서 생기며 기억(memory), 판단(judgement), 상황인식(recognition),계산(calculation), 학습(learning), 표현(expression?) 등 다수의 고위 대뇌기능장애로 이루어진 증후군‘으로 정의된다. 대표적인 ‘기억력장애’와 함께 사람과 시간, 장소에 대한 분별력을 잃어가는 ‘지남력장애’는 주변 사람들을 슬프게 하고 지치게 만든다.  ‘실행증(失行症)’, ‘실인증(失認症)’에 이르게 되면 숟가락이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지도 모르고, 사랑하는 가족도 몰라보고, 끝내 거울에 비친 자신마저 망각의 늪 속으로 떠밀어버리게 된다. 피해망상, 우울, 분노, 집착 같은 유충들이 온통 머릿속 습지를 떠다니다가 ‘전두엽수행능력 장애 같은 애벌레가 되고 급기야 성충이 되어 인간성을 갉아먹는 질병이다.

UN의 기준에 따르면 65세 이상의 ‘노인’인구가 전체 인구의 14%이상이면 ‘고령사회’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2018년(14.3%)에 ‘고령사회‘에 도달할 것으로 통계청은 전망했다.

 
‘고령사회’로의 진입속도도 빠른데 치매인구의 증가는 더하다. 65세 이상 노인인구 10명당 1명꼴이라니 두렵다. 2025년에 우리나라 치매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 설 것으로 보고 있다. ‘본인은 천국, 가족은 지옥’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가장 무서운 질병이 ‘치매’다.

외용연고를 만지작거리며 엄마는 아직도 ‘생각 중’이다. 혹시 ‘치매’에 대한 ‘사회적공감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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