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경무청에 연행되자마자 일제 경찰은 심문하기 시작하였다.

어떠한 일로 독립하려 하였는가?”

선언서와 같다. 나는 조신은 조선 민족으로 통치하도록 하려고 생각하였다. 조선은 일본이 약탈하였기 때문에 일본은 조선의 원수라고 생각하지마는 우리는 신에게 몸을 바치고 있으니까 그 원수를 갚겠다고 하지 않고 신의 마음으로 조선을 독립할 것이다. 그러니까 조선은 결코 일본을 위하여 이권을 제공하는 나라가 될 수 없으므로 독립하려고 한다. 이 일은 단지 조선을 위하여서만이 아니고 한편 일본도 이익이 된다고 생각한다.”

신석구 목사는 기독교인으로 원수를 사랑하는 성경 말씀을 따라 일본을 미워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독립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말했다.

민족대표들은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신석구 목사는 거사 이틀 전에 서명을 하였기 때문에 가벼운 형량으로 풀려날 수 있었지만, 검사의 질문에 조선은 독립될 것이며, 기회가 되면 독립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는 중형을 각오한 답변이었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함으로 선한 정치가 베풀어지고, 국민의 생활형편이 나아지고 있으며, 문명혜택을 받게 되었다는 상투적인 시혜론을 펼치고 있는 판사 앞에서도 약간의 물질적 혜택을 주고 조선의 정신을 잃어버리게 하는 얄팍한 통치로 4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독립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하였다.

출판법과 보안법에 기소되었던 48인의 협의는 예심 종결서를 접수한 고등법원에서 경성지방지방법원에 배정되면서 내란죄로 바뀌었다. ‘내란죄는 사형이 가능한 중대 범죄였다. 일제가 이렇게 협의를 변경한 것은 여름이 지나서도 독립만세운동이 수그러들지 않고 점점 과격해지므로 그 기세를 꺾으려는 위협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신석구 목사에게 독립은 현실이 아니라 미래의 약속이었다. 독립을 얻는가 못 얻는가 하는 것보다 독립을 향한 불굴의 정신과 투쟁이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하였다. 비록 영토는 빼앗겼어도 민족정신이 살아 있는 한 나라는 이미 독립한 상태로 접어들었고 완전한 독립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을 잡으려고 가노라는 바울의 고백과 다를 바 없었다.

심문과 재판을 받는 동안 신석구 목사는 사실은 숨기지 않고 그대로 진술하였지만, 동지들에게 불리한 진술은 가능한 한 피했다. 자기를 거사에 참여시킨 오화영 목사에게 무거운 죄를 씌우려는 재판정의 유도 심문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한용운에게도 혐의를 씌우려고 집요하게 질문하는 재판장에게 한용운이 말한 것은 자세히 알지 못하오.” 하면서 불교 승려인 그를 끝까지 보호하려 하였다. 이처럼 종파를 초월하여 동지를 보호하려는 그의 노력에 불교인과 천도교인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어, 이승훈 김창준과 함께 꿋꿋하고 우직한 호기 있는 기독교 민족운동가로 비쳤다.

신석구 목사는 손병희 등과 함께 미즈노 검사에게 징역 3년을 구형받았다. 만족대표로 가장 늦게 참석하여 선언서 배포 작업 외에는 별다른 활동이 없었던 그를 주모자급으로 분류하여 3년 구형을 내린 것은 오랜 신문과 법정에서도 기개를 잃지 않고 강한 독립의지를 내보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신석구 목사는 19201030일 결심공판에서 2년 징역형을 받았다. 미결수로 복역했던 360일을 가산하도록 판결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3년 선고를 받은 셈이었다. 그를 비롯한 유죄 판결을 받은 37인은 더 이상 재판은 의미가 없다 여겨 상소를 포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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