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천호 목사 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십자가를 진 신석구’

신석구 목사는 용강경찰서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예기치 않은 해방이었기에 죄수들이나 경찰당국도 어떤 조치를 취할지 몰라 해방 이튿 날에 되서야 석방되었다.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건강이 악화된 그의 모습을 본 가족들은 아들집에서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편안하게 노년을 지내기를 원했지만 어느 정도 건강을 추스른 그는 교회로 돌아가 목회를 시작하였다.
목회하는 중에 틈틈이 진남포나 평양에 나가 교회 재건과 민주정부 수립에 관한 논의를 하였다. 이미 나이가 70세가 넘었기에 전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3·1운동 민족대표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사상적으로 변절하지 않은 지도자로 그의 존재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신석구 목사는 철저한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 선봉자로 공산주의 정권과 배치되는 신념으로 공산당의 견제와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공산정권과 충돌한 것은 1946년 3월 1일이었다. 해방 후 처음 맞는 3·1절이라 모든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공산당 쪽에서 선수를 쳐 3월 1일 평양역에서 일반사회가 총망라된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개최하기로 하고 ‘애국반’을 통하여 동원령을 내렸다.
해방직후 김일성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가졌던 기독교계는 1946년 1월 조만식 선생이 구금된 후 반공노선을 취하여 평양의 교회지도자들은 별도의 3·1절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해방 후 처음 맞이하는 3·1절 행사이기에 공산당 측에서도 많은 신경을 쓰면서 행사를 준비하였다.
 그들은 평양지역의 유일한 3·1운동의 민족대표인 신석구 목사에게 3월 1일 평양중앙방송에 출연하여 3·1운동에 관한 연설을 해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방송을 수락한 신석구 목사가 방송국에 들어서니 그들이 준비한 원고가 놓여 있었고, 방송관계자는 그대로 읽어 달라 주문하였다.
그들이 준비한 원고 내용은 ‘3·1 운동은 실패한 운동이다. 그것은 공산주의 세력이 주도하지 못해 인민대중을 끌어내지 못했기에 이제 공산당이 들어서서 토지를 개혁함으로 진정한 혁명이 이루어 졌다’는 내용이었다.
생방송으로 시작된 연설에서 신석구 목사는 공산당의 요구를 거부하고 ‘첫째로 3·1운동이 어째서 실패한 운동이냐 그 때 모든 민족이 마지막 순간까지 비밀을 지키고 단결하였는데 이보다 성공한 거사가 어디 있느냐, 둘째로 3·1운동을 공산당이 주도했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때는 공산당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나 했느냐, 셋째 토지개혁과 3·1운동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며 자신의 신념대로 강연을 시작하였다. 결국 10분 만에 방송은 중단되고 신석구 목사는 중앙정치보위부에 연행되어 며칠 동안 조사를 받고 풀려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신석구 목사는 공산당의 집중 감시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기독민주당 창당 작업에 참여하여 젊은이 못지않은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정당이 교회보다 우선일 수는 없었다.
기독교 민주당 창당과정에 참여하면서도 전면에 나서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석구 목사는 공산당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공산당의 정책과 방향에 찬성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독교를 적대시하며 ‘주일 선거’를 비롯한 기독교 신앙을 허물어트리려는 반기독교 정책을 수행하는 공산당 당국에게 항의를 하였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타협하지 않은 올곧은 신앙의 지조를 지켜온 신석구 목사는 해방이후에도 공산정권이 들어선 북한에 남아 있으면서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월남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양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는 목자의 고집으로 물리친 그는 공산당의 회유를 거절하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앞장서서 걸어갔다.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정의의 투쟁이자 그리스도의 제자로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려했던 십자가 신앙을 가진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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