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어머니, 국내 법원서 두 자녀 친자확인 받아내

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 필리핀 현지에서 어렵게 살아온 이른바 '코피노(Kopino)'가 국내 법원에서 친부와의 혈연관계를 확인받았다.
코피노는 한국인(Korean)과 필리핀인(Filipino)의 영어 합성어다. 시민단체 등에서 코피노의 친부를 찾아준 사례는 더러 있지만, 코피노가 직접 친자확인소송을 제기해서 이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양국 교류 확대와 비뚤어진 한국 남성들의 성문화, 낙태를 죄악시하는 필리핀 분위기에 따라 코피노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이번 판결은 작지 않은 사회적 파장을 낳을 전망이다.
◇ 필리핀인 어머니의 드라마같은 승소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가정법원 가사2단독 권양희 판사는 필리핀에 사는 A군과 B군이 한국에 사는 C씨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A군과 B군은 C씨의 친생자임을 인지한다"고 판결했다.
사업가 C씨는 한국에서 결혼해 자녀들을 낳았으나 혼자 필리핀으로 건너가 회사를 운영하다가 현지 여성 D씨를 만나 동거했다. C씨는 D씨와 사이에서 A군과 B군을 낳아 길렀다.
하지만 C씨는 10년 전 돌연 한국으로 귀국했다. 다시 돌아가겠다고 약속했으나 이후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다.
D씨는 C씨의 이름과 사진만 가지고 한국에 입국했다. 그는 불법 체류 위기에서 이주여성긴급지원센터를 통해 만난 변호사 도움을 받아 지난 2012년 12월 이 사건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은 1년 6개월 넘게 이어졌다. D씨는 C씨의 인적사항을 어렵게 특정해 그를 법정에 세웠고, 법원은 A군과 B군, C씨의 유전자 검사를 관련 기관에 맡겼다. 그 결과 혈연관계가 객관적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D씨가 감정 비용 1천여만원을 소송구조 제도를 통해 지원받고, 법원이 유전자 검사를 계속 거부하는 C씨에게 강제수검 명령과 함께 과태료를 고지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C씨는 자신의 국내 가정이 파괴될 수 있다며 완강히 버티다가 마지못해 검사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권 판사는 필리핀에서 작성된 아이들 출생증명서에 C씨가 아버지로 기재된 점, 유전자 검사 결과 혈연관계가 인정된 점 등을 바탕으로 지난달 30일 A군과 B군의 친자확인 청구를 받아들였다.
D씨는 이 판결이 확정되면 C씨에게 양육비 등을 청구할 수 있게 된다.
D씨를 무료 변론한 조동식 변호사는 "D씨가 단순히 금전 취득을 위해 소송을 낸 것은 아니다"며 "A군과 B군을 C씨 호적에 편입시켜 한국에서 키우고 싶어하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 시민단체 "근본적 문제 해결은 인식 변화부터"
코피노는 비뚤어진 한국 남성들의 성문화와 무관치 않다. 상당수 코피노가 해외 성매매 결과로 태어난다. C씨처럼 사업가나 유학생이 현지 여성과 동거 중에 낳은 아이를 버리는 경우도 많다.
코피노 지원활동을 하는 한국코피노협회 한문기 협회장은 "필리핀 한국인 관광객이 연간 100만명을 넘었다"며 "골프 치고 성매매하는 상품이 음성적으로 판매되면서 코피노가 더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한 협회장은 "예를 들어 호주인이나 중국인이 현지 여성과 아이를 낳으면 소액이라도 매달 양육비를 보내는데, 유독 한국인만 아무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빈곤이 만연하고 사회안전망이 부실해 많은 여성이 성매매로 생계를 꾸리는 필리핀 사정도 코피노 증가의 원인이다. 한국 남성은 피임기구 사용을 기피하고 필리핀 여성은 낙태를 죄악시하다 보니 아이들이 계속 태어난다.
정확한 코피노 수가 집계된 적은 없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아동성착취반대협회(ECPAT) 자료를 인용해 코피노 수가 3만명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현지 활동가들은 1만명 안팎으로 추정한다.
코피노 증가세가 뚜렷한 만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각계 노력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려는 `아빠 찾기'부터 인식 변화를 위한 캠페인까지 다양하다.
법무법인 세종 공익센터는 사단법인 탁틴내일(ECPAT 한국지부)과 함께 코피노 아버지를 찾아주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6건을 검토해 그 중 1건에 대해 코피노와 아버지 사이에 양육비 지급 약정서를 써줬다.
세종 공익센터의 강기효 미국 변호사는 "자칫 한국인 남성의 국내 가정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어 조심스럽다"며 "소송 제기는 대단히 신중히 접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현숙 탁틴내일 상임대표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한국 남성들의 인식 변화를 통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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