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은순(문학평론가)

화가인 친구와 운보의 집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가게 되었다. 지척이 천리라고 가까이 있으면서도 자주 가 보지 못한 곳이던 터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애들 어릴 때는 자주 소풍삼아 가곤 하던 곳이었기에 지난 시절 추억의 장소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얼마 전 일인 듯 싶은데 햇수로 따지니 이십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친구도 오랜만에 만나는 터라 반가웠고 모처럼 소풍 가는 느낌이었다.
 “운보의 후예들”이라는 제목의 동양화 전시회는 청주,청원 통합 기념 행사라고 했다. 한여름의 녹음을 실감하며 운보의 집으로 가는 길은 아련한 추억에 잠기기에 충분했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보니 어느새 한 여름으로 들어선 듯 따가운 햇살이 강렬하게 쏟아져 내렸다.
 운보 생가를 지나 전시실에 들어가 작품을 감상하는데 눈에 익은 작가들의 작품이 많이 눈에 띠었다.
 안면이 있는 젊은 화가 한 사람이 며칠 뒤 뉴욕으로 전시 차 떠난다며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워낙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는 화가라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그의 작품을 산 적이 있다. 동양화임에도 진부하지 않고 현대적인 세련미를 갖추고 있는 그의 작품을 보면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 든다. 뉴욕의 초청전을 마치고 연이어 독일 전시회가 이어진다고 했다. 세계적인 도시에서 그의 작품의 진가를 알아차리고 있는 듯 했다. 모쪼록 외국 전시회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작품을 둘러보고 전시실 옆에 있는 조각공원으로 갔다. 입구에 작은 연못이 놓여 있고 야트막한 동산에 아기자기한 작품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연못가에 무성한 연잎위에 작은 개구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신기한 마음에 들여다보고 있는데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야트막한 동산을 오르는데 다람쥐 한 마리가 앙증맞은 모습으로 지나갔다. 모처럼 마음에 생기가 도는 듯 했다.
 간단히 본 행사를 마치고 운보 생가에서 작은 잔치가 있었다. 운보 생가 정원에는 예전처럼 연못과 정자가 놓여 있었고 운보선생 생전에 빨간 양말을 신고 앉아 계시던 마루도 그대로였다.
 방송작가 시절 운보선생 특집을 몇 차례 한 적이 있어 운보선생과 가족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고 여러 해 동안 농아복지회라는 모임 회원이기도 했기에 운보의 집은 이래저래 나와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이런 사실조차 잊고 지냈는데 오랜만에 운보의 집에 오고 보니 지난일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앞마당 음식상에는 수육이며 떡, 과일 등이 소담스레 차려졌고 막걸리, 보리밥도 연이어 나왔다. 야외에서 먹는 막걸리 맛이며 열무비빔밥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옛날식 작은 양푼에 보리밥과 열무,오이채 썬 것,고추장을 넣고 비벼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사회자가 나오고 노래가 시작되었는데 식사하는 동안 내 옆 수줍게 앉아 있던 풋풋한 아가씨가 알고 보니 초청가수였다. 도청직원이라고 하는데 오월에 결혼을 했고 내 자식 뻘 되는 아가씨였다. 그녀의 젊음이 눈부셨고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던가 싶었다.
 오랜만에 만난 조각가 한 사람은 여전히 진천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며 건강하게 그을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의 굽이치는 인생살이에 대해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어느 날 예고없이 찾아온 불행한 사건과 오랜 절간 생활, 마음공부에 정진한 사연이 드라마틱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민족의 정신적 뿌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철학이 특히 감동적이었다. 그는 운보생가 담장에서 새가 교미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며 보여주기도 했다.
 대금연주, 창, 통기타 가수들이 등장하며 작은 음악회가 무르익고 있었다. 크고 화려한 행사도 좋지만 작고 소박한 모임이 더 인간적이고 친화력을 주는 법이다. 오늘 우연히 찾게 된 전시회를 통해 영혼을 빗질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작품 감상을 통해 마음을 정화시키고 숲속을 거닐며 자연을 음미하고 흥겨운 잔치를 통해 흥을 돋울 수 있었으니 마치 옛 시절 풍류객이 된 느낌이었다. 자연과 예술, 사람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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