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공증인 / 변호사)

 80년대 대학시절 어떤 교수가 세계에서 가장 모순적인 이름을 가진 정당이 어떤 정당인지아냐고 물었다. 중남미 정치사를 전공한 그 교수는 멕시코의 ‘제도혁명당(Partido Revolucionario Institucional)’이라고 하였다. 이름 자체도 실제 정치현실도 코미디라는 것이다.

 정치학적으로 ‘혁명’은 급격하고 근본적인 사회변화로 그것은 기성 질서나 공식의 절차를 의미하는 ‘제도’ 밖의 정치현상인데 ‘제도적으로 혁명을 하겠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지 않고,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그들은 1929년부터 수십년간 유일정당으로 독재를 행하여 왔음에도(그 이후도 10여년을 더 집권해 2000년 대선에서 패배할 때까지 70년간 독재를 하였다) 체제전복적인 ‘혁명’을 찬양하고, 수십년간 부정선거와 부패 등의 불법으로 권력을 유지하였음에도 ‘제도’ 운운하니 이보다 코미디 같은 현실이 없다고 하였다. 제도를 무시하고 부식시킨 것이 그들이고 혁명의 대상이 그들 자신인데, 오히려 그들이 제도를 내세우고 혁명의 주체인양 선포하고 있다는 조롱일 게다.

 세월호 참사이후 박 대통령은 여러 자리에서 ‘국가개조’를 이야기 하고, 참석한 공무원들은 이를 받아 적어 부처로 돌아가서는 부하 공무원들에게 이를 열심히 전달하고, 언론들마다 수많은 칼럼니스트들이 등장하여 국가개조, 사회체질개선, 국민대개혁을 이야기 하고 있다.   
 국가‘개조’? 그러나 우리에게는 ‘개조’라는 말 자체에 불쾌한 역사를 갖고 있다. 민족개조, 정신개조, 국민개조 등 그것은 일제와 군사정권 시대의 단어였다. 그러나 단어의 꼬투리를 잡아 시비하고 싶지는 않다.

 ‘국가’개조? 나라 전체를 뜯어 고쳐 새롭게 만든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찌나 미국 등 국제질서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거나 국가간 질서를 자의적으로 개편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갖춘 집단에서 사용하는 ‘세계’나 ‘국제’ 정도의 규모를 제외하고, 개조의 대상으로서 ‘국가’는 최대의 규모일 것이기에, 국가개조는 정치경제, 사회문화, 시민정신, 사회정서 등을 모두 망라한 총체적이고 근본적이고 급격한 개편을 이루겠다는 것일 게다.

 그러나 국가개조라는 말 속에서, 과거 현 정부의 주요한 정책이라던 경제민주화?창조경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엇을 어떻게 개조한다는 것인지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단지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나 관피아, 공직사회의 부패, 안전 소홀, 위기대처시스템 등에 대한 개혁을 지칭하려고 하였다면 이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만약 그렇다면 과장된 액션을 취하며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또 하나의 ‘슬로건 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경험한 바가 있다. 과거의 주요한 슬로건이었던 경제민주화, 창조경제는 본래 속빈 강정처럼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였고, 그것마저도 오히려 복지축소, 규제완화, 대기업특혜로 변질되었지 않았던가!

 말의 공허함과 과장됨만이 문제가 아니다. 개조의 주체와 대상도 혼동되어 있다. 사회적 헤게모니는 물론 정치권력마저 장악하고 그리고 수십 년간 지금의 잘못된 국가체제를 주조하여 온 지금의 보수집권세력이,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차원의 국가개조를 말하는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더우기 그런 그들이 개조의 대상으로 자신들만 빼고 나머지 사회부문 모두를 지칭하며 오히려 개조의 주체로 등장하는 모습을 보면, 수십년간 쓰레기 더미(적폐 積弊)를 만들어 온 자들이 이제야 냄새가 난다고 호들갑을 떨며 주변 사람들을 타박하고, 매를 맞아야 할 자들이 오히려 매를 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월호 참사로 드러나 우리사회의 맨 얼굴은 국가개조라는 혁명적 단어가 필요할 정도이고, 이에 대한 근본적 체질 개선이 더 이상 미루어질 수 없고, 정부로부터 시장과 시민사회에 이르는 전체 국가체계에 대한 새로운 제도 디자인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하여는 시민 모두 공감한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책임 있는 자의 반성?성찰과 시민들의 공감?참여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멕시코 제도혁명당의 한국판 버전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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