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주 희(침례신학대학 교수)

운명이라면 운명일 수 있겠다. 피가 흐르고 흘러 상처 투성이로 살면서도 기를 쓰고 그 사랑을 피하지 않고 살아낸 의지를 보자면. 소설가 서영은은 자신의 소설 ‘먼 그대’ 주인공 문자처럼 유부남인 남자, 김동리의 세 번 째 부인이 되었다. 삼십년의 나이차를 뛰어넘고 세상의 시선들을 견디는 일 말고도 가슴을 뛰게 하던 그 남자의 인색과 소유욕을 견뎌내는 것을 넘어 자신에 대한 그의 사랑이란게 어쩌면 아주 허약할 수도 있다는 의혹까지 물리쳐가면서 제자에서 애인으로 아내로 간병인으로 살아냈다.
그 남자, 나는 다 가졌다 첫째 아내는 자식을 주었고 둘째 아내는 돈을 주었고 셋째 아내는 사랑을 주었다고 말하는 남자, 사랑은 목숨 같은 것이라고 말한 남자. 그의 삶이 그대로 한국 현대 문학의 역사가 된 김동리는 이미 본부인을 버리고 두 번째 부인과 살면서도 서른 살이나 어린 제자 서영은을 곁에 두고 싶어했다. 자의식 강하던 이십대 서영은에게 김동리 소설은 매력있게 보이지 않았어도 ‘현대문학’ 창작 실기를 강의하던 박경리 소개로 소설가 추천을 받으러 만나 둘은 사랑이라는 걸 시작했다. 소설 『꽃들은 어디로 갔나』 에는 작가 서영은과 문학의 스승이고 연인이고 남편이었던 김동리가 살아간 이야기가 들어있다.   
김동리와 서영은의 관계는 한 때 세간의 스캔들이었다. 김동리는 첫 번째 부인과 자식을 낳으며 살던 중 손소희와 연애를 했고, 손소희와 살면서 서영은과 연애를 했다. 이십년 넘는 세월동안 둘은 불륜을 지속했다. 소설 속에는 첫 번째 부인이 이혼을 안 해주는 바람에 십년간 동거인으로 살았던 두 번째 아내가 ‘남의 눈에 눈물 흘리게 했으니 내 눈에서도 눈물 나와야 되겠지’라고 자탄하면서 분노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 이혼의 위기를 넘겼다고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당한 갖가지 수모를 남편의 새 연인에게는 절대로 되돌리지 않겠다고 결심까지 했다고. 두 사람은 두 번째 아내가 암 투병을 하다 죽은 지 얼마 안돼 절간에서 식을 올리고, 이십년간 숨겨진 관계를 청산하고 공식적인 부부로 살기 시작한다. 연인이 마흔 중반이고 남자가 칠십 중반의 때였다. 남자의 세 번째 아내가 된 여자는 알게 된다. 남자가 인색하고, 고집스럽고, 겁이 많은 노인이라는 것.
오랜 연애 기간 동안 그렇게도 가슴을 설레게 했지만 함께 살게 되면서 가진 것을 잃을까봐 벌벌 떠는 노인의 모습만 보이는 노인 곁에서  죽은 전처의 영정에 예를 표하면서 아내인 것도 아닌 것도 아닌 존재로 수모와 모멸을 참으며 살아가게 된다. 결혼 뒤 삼년이 지나고 남자는 식물인간으로 쓰러져 앓는 오년 동안 여자는 간병인으로 살았다. 제자에서 연인으로 아내로 간병인으로 그 한 남자의 곁을 지켰고 남자는 숨을 거둔다. 전처 아들은 극단적인 험담을 퍼부었고, 아버지가 잠든 머리맡에서 ‘너는 우리 아버지 요강에 지나지 않아’라고도 했다. 이 징글징글한 사랑. 불륜이고, 모멸이고, 부끄러움인 이 관계. 두 사람에게도 이미 휘황한 후광은 사라져버린 이 징한 사랑.
운명이고 사랑이고 인연이라는 휘황한 어휘를 들씌운다고 해도 둘을 보아야 했던 두 번째 아내와 첫 번째 아내가 낳은 자식들로는 용납하기 힘들 둘의 관계. 이 소설을 어떻게 보면 좋을까. 작가는 어쩌자고 자기 나이가 칠십이 넘은 나이에 이 이야기를 꺼내 들었을까. 이 소설은 남녀 사이의 만남을 주제로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아름답고 설레고 그리운 시절을 지나서 고통스럽고 슬프고 사무치는 존재 자체에 대한 한계’의 이야기이다. 서영은은 이 소설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작가의 말에 적어 두었다.  

“예전에 한 시인이 인도 여행 중 길에서 화장 장면을 목격하고 그 곁에서 밤새도록 시체 타는 것을 지켜보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살과 뼈까지도 다 타고 가장 나중까지 불 속에서 지글거리는 것이 있어 ‘저게 무었이냐’고 물었더니 ‘심장’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 그 낯모르는 사람은 아주 담담하게 ‘내 아내’라고 대답하더라 했다. 불구덩이 속에서 지글 거리는 붉은 심장과 ‘내 아내’ 사이의 무심심함 그 무한유한 인생의 심오함을 소설로 담아내고 싶었다 ”
꽃은 스러짐을 통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열매로 맺어지는 과정, 열매가 씨앗을 품고 있는 것은 사계를 보아야 안다고, 인생도 사계를 다 거쳐봐야 인생의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된다고 작가가 이야기한다. 기쁨, 설렘, 그리움을 거쳐서 수천 만개의 상처까지도 그러안게 되어야 한다고, 기쁨과 행복의 세월 뒤엔 천개 만개의 흉터가 있다고. 사랑의 기쁨이 사라진 자리에는 사랑의 책임이 남고, 사랑의 책임을 다하는 자리에 진짜 사랑의 완성이 일어난다고도. 그래도 이런 사랑은 어질어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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