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도 힐링토크 힐링상 - 윤인순(웃음강사)

▲ 윤인순씨

 

경로당에 가면 어르신들이 많이 오시잖아요. 저는 경로당에서 웃음강사로 활동하고 있는데 어르신들이 항상 이것저것 먹을 것을 많이 주십니다. 어저께는 한 분이 센빼과자(전병) 남은 것을 신문지에 싸고 또 싸서 “선상님, 이거 잡솨봐요. 선상님 드셔”하고 주십니다. 전 그런 모습을 보면 돌아가신 친정엄마 생각에 항상 눈물이 납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어느 날 아이들과 얼음 깨는 장난을 하다가 우물에 빠졌습니다. 옆집 언니가 끌어 올려줘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저는 평생 짊어지고 갈 병을 얻고 말았습니다. 기관지와 폐에 물이 찼는데 그때만 해도 옛날이라 저희 엄마가 그냥 청심환 하나 먹이고 놔두셨나봐요. 그때부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이어졌습니다. 밤이면 숨이 차서 눕지도 못하고 앉은 채로 하얗게 밤을 지새웠어요. 엄마는 그런 저와 함께 매일 같이 밤을 세워주고, 버스비 5원을 아끼기 위해 저를 업고 십리 자갈길을 걸어 병원에 다니셨어요. 엄마의 무명치마 끝자락에는 항상 흙과 먼지가 묻어있었는데 저는 그 고단함을 몰랐어요. 엄마라는 이름은 자식에게 주는 것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깨를 털고 오던 어느 여름날,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신 저희 엄마는 가슴도 손도 따뜻해 “엄마”라고 부르면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날 것 같았어요.

엄마는 열일곱에 시집을 왔대요. 하루는 하도 배가 고파서 베를 짜다 말고 창밖을 보니 상추가 무성하더래요. 그 상추를 뜯어서 된장을 발라 몰래 먹고 있는데 시누이가 그 모습을 보고 자기 엄마에게 일러바쳤답니다. 시어머니가 부엌 바닥에 놓고 마구 두들겨 패는데, 엄마는 그 아픔을 느끼기 보다는 입 안 가득 문 상추가 그렇게 맛있더랍니다. 그 이야기는 평생 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저는 힘들어서 죽고 싶을 때마다 엄마의 그 말을 떠올리며 힘을 얻곤 했습니다.

제가 아파 공부를 못한 것이 어머니에게는 한이었습니다. 저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어요. 학교 가는 날 보다 병원 가는 날이 더 많았지요. 어린 날을 고무줄 놀이 한 번, 달리기 한 번 못하고 고스란히 병마와 싸워야 했습니다. 간신히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도저히 안되겠어서 중학교 2학년 때 공부를 중단했어요.

그리고 스물일곱살이 되어 진천으로 시집을 갔어요. 어릴 때, 제 별명은 젓가락이었습니다. 하도 말라비틀어진 모습에 이름 대신 찰거머리처럼 따라 다니던 별명이었지요. 그 모습으로 호밋자루 한 번 안 잡아 본 채로 5대독자 홀시어머니 집안에 시집을 왔으니 어느 시어머님인들 예뻐 보였을까요. 저는 평생 시어머니에게 “우리 아가야”, “우리 며느리야” 소리를 듣지 못했어요. 어머니는 저를 ‘키 큰 X’이라고 부르셨죠. 키 큰 년이 왜 방에서 책 읽어. 왜 마실을 다녀. 항상 이런 식이었어요. 뒤꼍의 살구나무가 제 유일한 안식처였습니다. 날마다 그 살구나무 아래서 두고 온 고향과 친구들, 부모님이 그리워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부모님은 3년을 두고 돌아가셨습니다. “너는 공부를 해야 하는데.”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 마지막 남긴 이 한 마디를 저는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았습니다. 젊어서는 너무 가난해 먹고 살기도 바빠 공부를 할 수 없었어요. 저는 아들 3형제의 공부를 다 시켜 놓고 2004년 봄.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가야하는 청주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을 했습니다. 낮에는 깨밭, 콩밭을 메고, 밤에 공부를 했어요.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2008년 충청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대학 졸업을 하는 날, 졸업장을 들고 부모님 산소에 갔어요. 산소 앞에 졸업장을 놓고 “엄마 나 대학 졸업장 땄어.” 하고 한없이 울었어요.

졸업을 하고 나서, 남들은 정년퇴직을 할 나이지만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청주대 평생교육원에서 웃음치료 강사 자격증을 획득했고, 문해교육과 EM강사 자격증도 땄습니다. 저는 지금 외로운 경로당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웃음치료를 하고 있고, 전쟁과 가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이름 석 자 쓸 줄 모르는 어르신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만 안고 돌아가신 저희 엄마를 생각하면 지금도 저는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장에도 잘 가시지 못하는 외로운 어르신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웃음을 드리고, 글자를 가르쳐드리고, 비누를 만들어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90여 호 마을의 6년차 부녀회장이고, 겨울이면 만두와 뜨개, 농약병, 공병, 헌옷 판매 수입으로 요양원이나 장애인시설을 정기적으로 찾아가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행복한 여자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정리/조아라, 사진/임동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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