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희 팔(논설위원, 소설가)
언니가 죽고 삼우제까지 마친 날, 연옥인 엄마가 죄인처럼 하고 앉아 형부한테 기어드는 소리로 말하는 걸 옆에서 보고 들었다. “여보게, 기민이는 내가 시골집으로 데려다 키울 테니 자넨 맘 추스르는 대루 새장가 들게 앞날이 구만리 같은 자네 아닌가. 그런다구 우리집식구 어느 누구도 자네 탓할 사람 없어.” “어머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절대 그럴 생각 없습니다. 저를 아들마침이라 하셨잖아요. 사고무친 저를 받아주신 어머님이신데….” 이때 연옥이가 나섰다. “엄마, 내가 기민이 데리구 형부하구 얼마간 여기 있을게 기민이 이제 겨우 첫돌 지난 애야 날 때부터 내가 돌봤어 나 없으면 안 돼. 엄마도 알잖아. 형부 그렇게 할 게요 괜찮지요?” “아냐 괜찮아. 그동안 우리 땜에 처제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언니는 연옥이 기억으로는 안 아픈 날이 없었다. 연옥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언니가 읍내중학교에 들어갔지만 엄마 아버지와 번갈아가며 병원엘 들락거리더니 1학기 겨우 지내놓곤 아예 집에만 있었다. 누워 있는 날이 더 많았고 일어나 출타하는 날은 병원엘 갔다 오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면서도 늘 명랑했다. 얼굴에 핏기가 없고 몹시 파리했는데도 하나밖에 없는 동생 연옥이에게는 상냥하게 대했다. 그래서 학교만 갔다 오면 연옥인 언니 있는 방으로 제일 먼저 들어가서 그날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수다스럽게 늘어놓는데 언니는 그러는 걸 재밌어 하고 웃어주기까지 했다. “연옥아, 이제 그만 나가 언니 기운 없어 잠 좀 자야 돼 이따 또 와!” 하는 엄마의 말이 나올 때까지 같이 있었다. 딴에는 어린 소견에도, 언니가 동생한테 아파하는 걸 보이지 않으려 애쓴다는 걸 알아 그에 대한 보답차원에서 행한 일과였다. 언니는 몇 개월 후 다시 학교를 다니다 겨울방학을 맞고 또 다시 개학 후 학교 다니다 2학년이 되고 그러다 또 집에서 쉬고. 이러기를 반복하다 용케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어른들이 무슨 수를 썼을 거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험 봐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
고등학교 때도 언니는 가다말다를 반복했는데 물론 아파서였다. 어른들은 언니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를 말해준 적이 없다. 연옥이도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러면서 언니가 학교 결석 땜에 부실할 수밖에 없는 학과를 연옥이가 아는 범위 내에서 대강 일러주면 그걸 또 그렇게 고맙게 여기며 좋아했다. 그러다 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호전을 보이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이었다. 그리고는 그 징검다리 학교 결석도 종지부를 찍는 고등학교 졸업을 끝으로 더 이상 대학진학도 하지 않았다.
이제 어느 정도 몸도 추스르게 되고 나이도 드니 어른들은 언니의 혼사에 열을 쏟더니 급기야 신랑감이 나타났다. 사고무친이지만 그래도 제법 큰 공장 생산직의 젊은이다. 엄마 아버지는 그의 성실성을 또 딸들밖에 없는 터에 사고무친의 결함은 오히려 아들마침으로는 마땅한 자리라 여기고 쾌히 받아들였다. 당사자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연옥인 언니의 결혼사실이 신실하기만 했고 무엇보다 형부라는 남자식구가 생겨났다는 것이 즐거웠다. 이 무렵 연옥인 고등학교까지만 마치고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집안의 경제사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언니의 신변에 이상이 감돌기 시작했다. 겨우 결혼 3년 남짓의 때였다. 전력의 건강부실 때문인지 임신에 실패를 거듭하다가 인제 하나 건졌는데 대신 그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출산 1년 남짓 만에 생을 아기와 맞바꾼 것이다. 그 1년 동안 연옥인 아예 언니 집으로 들어가 머물면서 언니 대신 아기를 돌보며 키웠다. 그 애가 기민이다.
그런데 엄마와 형부의 허락을 받고 기민이를 얼마간 돌보겠다고 죽은 언니 집에 남아있던 연옥이가 한 4개월 뒤에 엄마와 아버지 앞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엄마 아버지, 나 이 집에서 아주 기민이와 형부하고 같이 살래요!” “무슨 소리냐?” “형부한텐 잠정적으루 허락을 받았어요.” “아니, 그동안 니들 둘이 무슨 일이 있던 게야?” “그런 것 아녜요 제 결심이에요.”
너무 확고하고 당돌한 태도에 부모들은 하도 기가 막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시골로 내려왔다. 그리고 아버지가 영 마음이 답답해서 이를 이기지 못하고 하소연이라도 하려고 구학문을 섭렵해 학자라고 이름난 동네 어르신을 찾아갔다. “도대체 이럴 수가 고금천지에 있을 수 있습니까 부끄러워 누구한테 입도 벙긋 못하겄습니다.” “있지!” “예?” “자매역연혼(姉妹逆緣婚)이란 건데, 홀아비 된 사람이 죽은 아내의 언니나 동생과 하는 혼인을 말하는 게야.”
이에 다소 마음을 누그리고 그냥 내버려두고 있는데, 연옥인 제 자식 없이 기민이만 데리고 셋이 산다. 그 기민이가 벌써 고등학교 2학년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