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관 사업 20만달러 기부한 포석 조명희 선생 막내아들

  

 

지난 9월 2∼11일 9박 10일간 조명희 선생의 삶의 궤적을 찾아떠난 조명희 답사단(단장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이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만난 조 블라디미르(77)씨는 스코틀랜드식 빵모자(tam-o-shanter)에 노타이 세미정장 차림의 풍모가 썩 잘 어울렸다.

벌써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 댄디스트에 아티스트의 기품이 물씬 풍기는 조씨는 답사단이 러시아에 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런 기별도 없이 연로한 몸을 이끌고 모스크바에서 극동의 하바로프스크까지 한달음에 마중을 나왔던 것이다.

조씨는 포석 조명희 선생의 막내 아들이다. 조명희 선생의 자녀 중 딸 선아씨와 아들 선인씨가 별세했으니 이제 그가 선생의 생존해 있는 마지막 자식이다.

포석 조명희 선생은 한국 근현대 문학사에 선구자적 역할을 한 인물로, 한국 최초의 창작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발간했고, 한국 최초의 희곡 ‘김영일의 사’를 썼으며, 한국 최초로 일본과 조선, 러시아 순회 연극공연 활동을 벌였다.

또 한국 최초의 망명작가로, 1928년 소련으로 건너가 교육자, 작가, 언론인, 민족주의자로서의 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하여 극동지역에서 한인들이 꼽은 항일투쟁영웅 59인의 한 명이기도 하다.

조씨는 한국말을 알지 못한다. 겨우 몇 가지의 단어와 간단한 인사말 정도만 알고 있다. 

거기엔 그의 비극적 가족사와 한국 근대사의 암운이 병존해 있다. 조명희 선생이 일제 스파이의 누명을 쓰고 1937년 KGB요원들에게 끌려간 뒤 이듬해 총살형을 당했을 때 그는 생후 4개월의 갓난아기였다.

비극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어머니 황명희(마리아)와 세 자녀는 짐짝처럼 열차에 내팽겨진 채 시베리아 벌판을 횡단해 불모지와 다름없었던 우즈베키스탄에 버려졌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그의 어머니 황여사는 억척같이 자식들을 키워 러시아 사회의 중견일꾼으로 성장시켰다.

때문에 그는 한국어 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 생활양식, 가치관 등 모든 것이 생경하다. 그런 까닭에 조씨의 인터뷰는 조명희 선생의 외손자인 김 안드레이(전 타시켄트대 교수)씨의 통역으로 이뤄졌다.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답사단을 보면서 한편으론 뿌듯하고, 한편으론 죄스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버님이 생전에  벌였던 다양한 활동과 업적을 되짚어 그 가치와 위상을 재조명하고 새롭게 정립하려는 노력에 거듭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아들인 제가 해야 할 그 일을 이번 답사단이 해주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생후 4개월 되던 때 부친 조명희 선생과 생이별을 당한 까닭에 선생에 대한 기억이 그에게는 전혀 없다. 그래서 그는 더욱 안타깝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편린이라도 있으면 그 기억 떠올리며 추모의 마음 깊이 새길 수도 있으련만, 부친관 관련된 한 조각의 기억조차 없어 그는 ‘아버지의 부재’를 그저 막연한 공포로만 느껴왔었다.

“어머니(황 마리아)로부터 말씀은 들었지요. 아주 합리적인 분이셨다고 합니다. 말을 똑바로 하고 정확하게 말씀 하시는 분이셨다고요. 행동에 있어서 옳다고 여기면 끝까지 밀어부치는 분이시기도 했는데, 남 도와주길 잘하고 약자 편에 늘 서며, 최고 난관에 빠진 사람들 일을 늘 당신의 일처럼 돌보던 분이셨다고 합니다.”

조명희 선생의 마지막은 비극적 결말로 끝났지만 선생의 후손들은 러시아 각계 각층에서 중견 일꾼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조씨와 작고한 그의 형 선인씨는  러시아에서 수력발전소 관련 건축 프로젝트를 맡아 명성을 떨쳤고, 그의 아들 조 파엘(52)씨는 모스크바 중심가에 84층 건물을 가지고 있는 재력가로 활동하고 있다.

“구 소련시대에 우리는 한국에 대한 지식이 없었어요. 스탈린이 정책적으로 한국어를 못쓰게 했고, 교육 또한 받지 못했죠. 그러다보니 타향으로 가 사회생활을 했던 우리로서는 한국 문화와 전통 등에 대해 알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죠.

유감스럽게도 포석 후손들은 유럽적인 지역에 살기 때문에 그 환경에 동화돼 갔다고 할 수 있지요.

한국말을 잃고 한국의 전통을 잃고 한국의 뿌리를 잃어갔던 것이 한인 이주 역사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한국과 활발한 교류가 이뤄지고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고 여러가지 정보를 얻게 되면서 고국의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다양한 길이 열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내년 초순 포석의 고향 진천에 개관 예정인 ‘조명희 문학관’을 위해 20만 달러(한화 2억2000만원)를 선뜻 기부했다.

그게 무어 대단한 일이냐고 한사코 의미 부여를 마다하던 그는 조심스레 말했다.

“조명희 선생 후손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작은 도리를 했을 뿐입니다. 제가 기부한 돈이 포석 기념사업에 작은 기여라도 했으면 하는 바랍입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 자식으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한국에서 포석 조명희 선생에 대한 재조명이 일어나는 의미있는 종자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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