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자(수필가)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뚝 떨어져 집안에서도 긴소매를 입을 정도로 서늘해졌다. 그런가 하면 대낮에는 햇살이 따끈따끈하여 그것을 다시 벗어 놓아야 한다. 대낮 거리에는 긴 소매를 입은 이들과 반소매를 입은 이들이 반반이다. ‘하긴 이래야 곡식들이 영글지’  공기도 달라졌다. 눅눅하고 습기가 배인 그런 공기가 아니고 보송보송한 느낌이 쾌적하고 삽상하다.
  엊그제 후배가 전화를 하면서 일교차가 10도 이상 난다며 ‘저녁에 잘 때는 문을 꼭꼭 닫고 자라.’ 아니면 감기 든다고 일깨워주니 명심하여 문들을 닫는다. 가을은 가을 인가보다. 집 앞 공원에서 그렇게 그악스럽게 울어대던 매미소리가 신기하게도 일제히 뚝 그치고 그 자리에 풀벌레 소리가 대신 들어앉았다. 그 많던 매미들은 어디로들 간 걸까.
  9월은 여름인가 가을인가 고개를 갸우뚱 하게 하더니 이제 10월이니 진정 가을이다. 절기상으로야 입추를 가을의 시작이라지만 우리나라의 절기라는 게 언제나 한참씩 앞서가니 더위에 지친 서민들이 기분이나마 서둘러 가을을 느껴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늘이 조금씩 높아져 가고 들판의 벼들이 누렇게 물들어 가는 것을 언뜻언뜻 보며 막연하게 가을이 오는구나 하고 스쳐 가는 생각뿐이었는데 엊그제 초등학교 동창생들을 만나러 내 고향 충주로 달려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가을을 마음껏 가슴 속 깊이 들여 놓을 수 있었다.
  버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하늘은 현기증이 날 것 같이 광활하고 높았다. 목화송이 같은 흰 구름 몇 조각 유유히 흘러갈 뿐 무한히 넓고도 넓어 내가 하나의 점처럼 작아지는 느낌이다. 조각난 하늘만 보이던 도시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가슴 탁 트이는 감격이다.
   잇달아 펼쳐지는 황금 들판의 벼이삭들이 패어 고개를 숙였지만 아직 알곡이 꽉 차지는 않은 걸까. 벼 포기들이 돋보기로 햇빛을 모으듯 따끈따끈한 햇볕을 모아들여 알알이 익히느라 안간힘을 쏟는 모습이 대견하기만 하다.
   비탈진 밭에는 조 이삭이 머리가 무거워 고개를 푹 숙였고, 불그레한 수수이삭도 톡톡 터질 듯 영글었다. 길가에 핀 코스모스는 갖가지 색깔을 뽐내며 바람에 한들거리니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 절로 콧노래가 흥얼거려진다. 도시를 벗어나야 볼 수 있는 풍경들을 가슴 속에 갈피갈피 채우면서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나는 왜 늘 도시에 갇혀서 이런 값진 풍경들을 만끽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살고 있는가 후회스럽기만 하다.
   초등학교 소풍 때 가보고 60여년 만에 찾아가는 남산 창룡사 가는 길에는 충주가 사과 곳이라는 것을 실감하도록 빨갛게 익은 사과들의 단물 고이는 소리가 쪼로록 쪽쪽 들려오는 듯하다. 절은 알아볼 수 없게 변해 있었지만 아름드리가 된 감나무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이 열린 감들이 주황빛 등불이 되어 익어가고 있었다. 석종사 가는 길엔 억새가 하얗게 피어 물결처럼 일렁인다. 참으로 풍요로운 가을이다. 세계 어느 나라의 가을이 이토록 오밀조밀하고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을 연출할까.
  익어 가는 가을을 온몸으로 느끼고 돌아오니 또 한 아름의 가을이 기다리고 있다. 산골에 밤 밭을 일군 후배가 부쳐온 알밤 한 됫박을 풀어 놓으니 옹골지게 익은 밤들이 또롱또롱한 눈으로 일제히 나와 눈을 맞춘다. 두 손으로  한 움큼 집어 반들반들 윤기 흐르는 표피의 감촉을 느끼며 “어느새 이렇게 영글었니.” 장하고 대견하다는 말을 나는 그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나는 제 풀에 부끄러워지고 만다. 봄날 새 잎을 피우던 그 날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을 밤나무의 노고는 물론이요, 거름 넣고 가꾼 후배의 수고에 황송하여 머리가 숙여진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태풍이 휘몰아치던 날도 굳굳하게 견디어온 그들의 인내를 무슨 말로 다 표현 할까. 평평한 거실 바닥에 이것을 흩어 놓고 주우라 해도 힘이 들 텐데 비탈진 밤 밭을 오르내리며 이 밤톨들을 하나하나 주웠을 그 수고에 허리는 성할까 걱정스럽다.
  가을이 영글어 가던 날 나는 한 없이 낮아져야 함을 깨닫는다. 아무 것도 쥔 것도 나눈 것도 없는 내 빈 손이 한없이 부끄러워서 말이다. 저 영글어가는 열매들도, 이제 붉게 타오를 잎사귀들도 머지않아 결국은 낮게 내려앉을 것이기에 나도 그들을 닮아 낮아지기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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