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주 희(침례신학대학 교수)

 

세를 얻어 ‘방이 두 개, 베란다가 있고 낡은 세면대와 긴 거실 창, 녹슨 경첩으로 간신히 고정된 문짝이 달린 신발장이 있는 집’으로 세를 얻어 이사를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닦아내고 닦아내도 마르고 보면 끈적’이는 도배풀 자국을 일곱 시간 째 닦아내고 있다가 초인종소리를 듣고 문을 연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윗 층에 산다는 여자가 자기는 개를 세 마리 기르고 살고 있다고, 여기는 개를 기르지 않느냐고 어제 시끄럽게 하지 않았느냐고 두서도 없는 말을 횡설수설한다. 자기 위층 사람에게 시끄럽다고 시달렸다며 어디서 소음이 나는 지 밝혀내야 한다고 악을 쓰다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녀는 ‘요즘은 어디나 이상한 사람들 천지다. 미친년에 다 미친 놈, 천지’이라고 생각한다. 집 전체도 아니고 일부만 해 놓은 도배풀 자국은 일곱 시간이나 닦아내야 한다면 집주인은 도대체 얼마나 헐값으로 도배를 맡겼는지 생각해 볼 수 있고, 세입자가 그 청소를 고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집을 얼마나 대견하게 생각하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먼저 십몇 년을 살던 곳이 시대 변화에 따라 구멍가게나 있던 길에 마트가 생기고 분식점, 비디오 대여점이 들어섰다 간판이 바뀌다 마침내 휴대폰 매장이 들어서면서 무슨 음악인가를 밤낮없이 틀어대면서 공기를 타고 벽체가 웅웅대는 소음에 시달렸던 것이다. 소음에 지쳐 조용한 집을 찾아 이사를 해 왔는데 이 곳도 조짐이 수상하다. 소음은 윗층에서 쇠공 글리는 것 같은 게 시작되더니 이십대 초반 여자애들의 조심성 없음에서 구체화된다.
 늦은 밤에 쿵쾅거리고 문을 열어둔 채 고기를 구어대고 시끄럽게 떠들어대서 조용히 해달라지만 ‘죄송합니다아아아아’ 대답만 있고 여전히 시끄럽다. 견딜만치 견뎌내다가 다시 조용히 해달라자 얼굴을 찡그린 여자애가 ‘알겠다고요, 그런데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남의 집 벨 누르는 거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라고 묻는 부분은 압권이다. 소음은 계속되고 흥분한 그녀는 닥치는 대로 물건을 잡아 천장을 향해 던진다. ‘나는 이게 다 무서워서 불쾌한데 니들은 이게 장난이고 나만 미쳤고 내가 우습지?’하는 걸로 보아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오는 분노 표출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가 세를 얻으러 왔을 때 이 집에는  말을 잘 듣지 못하는 할아버지가 안방과 현관만을 오가며 혼자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머리를 기대고 앉았던 벽에는 머리 기름이 노랗게 배어 있었다. 늙고 무력한 할아버지는 자기가 아니었으면 그대로 살았을까. 자기가 내쫓은 건가 싶지만 돈이 있고 없는 차이였을 뿐이라고 그녀가 애써 무시하는 이유는 할아버지에게서 자기 미래를 예견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같은 계급’인 그녀는 미래에 그 할아버지처럼 될 것이고, 비정규직 계약이 끝나 회사를 나갈 수밖에 없던 선배처럼 될 것이다. 자기를 업신여기듯 키득대던 얄미운 이십대 여자애들도 별볼일 없는 똑같은 계급, ‘완전 같은’사람들이다. 남들에게 시달리지 않을 좋은 동네, 좋은 골목에 살 돈이 없으므로 이웃에게 시달리지 않을 권리가 없는 계급적 인간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지금보다 나아지지 못할 뿐 아니라 더 나빠질지 모른다는 두려운 불안은 그녀가 위층에 분풀이 하듯 물건들을 던져댄 다음 날 아침 문 앞에 와 있던 이가 던진 한 마디 ‘아래층이야 씨발 년아’에서 반전을 이룬다. 피해와 가해가 뒤범벅이 되면서 살아내는 현실. 금융권 도급으로 연체금 독촉 상담을 하며 사는 그녀의 직업은 또 어떤가. 자신도 비정규직으로 돈 없는 사람의 없는 돈을 받아내는 그 직업의 상징성은. 2014년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 황정은의  『누가』 의 이야기이다. 세상의 변화는 돈을 창출해내는 것과 관련 있는데 소설 속의 그, 그녀들은 속도를 확보해낼 수 없는 인물군이다. 궁핍에 대한 이야기는 늘 있어왔다고 해도 이런 변화와 관련된 이야기는 산업화 이후 대부분의 문화권 모든 시대로 확산되었을까. 이 소설은 실제 가난보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가난에 대한 불안 보고서라고도 할 수 있다. 유동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오는 불안이다. 만약 공통의 가치도, 이념도 지나가고 개인의 욕망이 전면에 포진하는 세대, 예측할 수 없는 천변도섭 미래 때문에 더 불안 충만한 거라면, 무슨 세기말처럼 돌림병처럼. 그렇다면  정국 불안의 유포자들, 이단 종파들의 불안 활용 종말론 같은 참극에 휘둘리지 않을 정도만 불안해야 하지 않을까도 점검해야겠다. 실제보다 더 불안을 과장하고 이용해온 극악의 역사가 불안의 역사보다 길지 않을까 하는 소회도 함께. 노인들이 텔레비전을 호젓하게 보실 시간쯤이면 질리도록 선전해대는 보험상품 판매자들 의도도 분석해가면서. 소설읽기도 인생 잘 살아내자고 하는 일 중 하나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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