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기 충북중앙도서관장

 

책을 많이 읽어야 된다는 말은 ‘말로만’인 것 같다.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는 건 낭만적일지는 모르지만,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는 건 어딘가 꾸밈이 있어 보인다.
수십만 권의 책 속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지 100일이 지났다. 그동안 책 선물을 많이 받았는데도 과연 몇 권이나 읽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독서 관련 행사인 ‘제2회 북페스티벌’이 우리 도서관 주관으로 열렸다.
많은 내빈들의 축하와 격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도서관을 찾은 현명한 ‘요즘 엄마’들의 참여 속에 행사는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내년의 더 좋은 행사를 위한 다짐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다짐을 조롱이라도 하듯,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발생했다.
행사가 잘 마무리 되어 모두가 한숨을 돌리고 있던 날 밤, 주차 안내를 위한 차단봉이 파손됐다.
CCTV로 확인된 범인(?)의 얼굴은 희미했다. 시간은 막 자정을 넘은 오밤중이다. 인상착의로 보아서는 학생으로 보인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즉시 경찰에 신고토록 했다.
하지만 보이는 화면도 희미한데다 이런저런 복잡한 절차도 있고 하니 자체적으로 보수하고 말자는 의견도 있었다.
20만원에 이르는 보수비는 ‘혈세’로 메우면 될지 모른다. 그러나 40년 가까이 바른 길을 걷고자 했던 공직자의 자존심이 뭉개지는 것 같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직원회의에서 공언했다.
“우리는 ‘교육’을 전제로 하는 기관이다. 공공기물 손괴라는 형사적 문제를 떠나 교육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행위를 묵과하는 건 ‘교육’이 아니다.”
‘서당개 3년’이 넘었다고, 내가 감히 ‘교육’을 이야기 했다.
자정이 넘은 한밤중이라지만 용감(?)하게도 ‘CCTV녹화중’이란 경고를 무시하고 명백한 범법행위를 한 그 학생은, 그날 무슨 생각 속에 잠들었을지 궁금하다.
‘혹시 ‘쥐’라도 자신의 행위를 보진 않았을까? 내일 모레 경찰서에서 전화가 오는 건 아닐까? 죄짓고 못산다는 게 바로 이런 거구나!’
이렇게라도 생각했다면 교정(矯正)이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런 의식 없이 편안히 잠들었다면 이건 문제다. 이런 아이들을 우리가 가르치고, 기르고 있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교육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국어시간에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를 ‘골고루’ 가르치긴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세상의 변화도 너무 빠르다. 컴퓨터가 있고 스마트폰이 있으니 글씨를 잘 쓰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계산기가 있으니 곱하기, 나누기를 손으로 해 볼 이유도 없다.
배우고 익히는 과정은 중요치 않고 오로지 결과만이 중요하다. ‘바른생활’ 학습은 이미 PC나 TV로부터 폭격 맞은 지 오래다.
효와 예를 강조하는 교장선생님이, 아이들은 물론 학부모, 선생님들로부터도 외면당하기도 한다.
먹고살만한 세상이 되었으니 그저 실용이 최고다. 돈이 최고고 학교에선 성적이 최고다. 대학 중엔 ‘그’ 대학이 최고다. 정치인 가운데는 말 잘하고, 매스컴 잘 타는 ‘꾼’이 인기다. 그런 정치인들은 ‘차라리 해산하라’는 모욕을 당해도 꿈쩍도 않는다.
이건 정상교육도 아니요, 정상사회도 아니다.
한 퇴직 교장선생님이 말한다.
“머리 좋고 똑똑한 아이가 반드시 인간적으로 성장한다는 기대를 갖는 것은 교직자의 큰 오산이다.”
내가 보기엔 말없이 묵묵히 서 있는 차단봉을 파손시킨 그 학생은, 밤늦게까지 공부 열심히 하는 ‘똑똑한’ 학생일 것 같다.
그러나 품성과 인성이 벌써부터 노란 싹수인 이 학생에게, 도서관장이 할 수 있는 말은 이 한 마디뿐이다.
“다수의 푸른 싹들을 위해 자네는 앞으로 도서관 출입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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