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진천 출신 이상범(80·사진) 시인의 시집 두 권이 최근 발간됐다.

등단 50년을 맞은 그의 시 중 정수만을 맛볼 수 있는 ‘화엄벌판’과 디카시로 독자와의 거리를 좁힌 ‘하늘색 점등인’이 그것. 평생 언어를 골라 시어로 엮어내는 일에 천착해 온 노 시인의 삶을 시집을 통해 만나보자.

●화엄벌판
억새꽃이 나부끼며 빛을 끌어당긴다/몸 비벼 금빛 띠고 다시 비벼 은빛 띠는/아직도 섬찍섬찍한 그 말씀의 영락소리/아득한 변방에서 물소리가 산을 오른다/망루의 높이에서 가슴을 치는 골물/내 눈빛 맑게 바래어 흩고 있는 억새꽃./정수리 찍어대면 샘물 터져 뿜을까/좌대에 눈감으면 그 여운의 높은 파고/잃은 것 얻은 것 없는데 밀짚모자 홀로 간다./가을 하늘 한 장 떼어 거울경문 걸어 두면/뉘이며 일어서는 비늘 빛 화엄설법/육신은 보시로 올리고 바람 속에 듣는다.//(‘화엄벌판’ 전문)

‘한국대표 명시선 100’ 중 한 권으로 발간된 ‘화엄벌판’은 이상범 시인이 50년간 발표한 시 중 엄선해 엮은 책이다.

‘신전의 가을’, ‘별’, ‘풀꽃 시경’ 등 그가 1967년부터 2012년까지 발간한 20권의 시집 중 50편을 추려 실었다.

196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화려하게 얼굴을 알린 이 시인이 삶과 문학, 자연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섬세하고 감성적인 시어로 표현했다.

표제작 ‘화엄벌판’을 비롯, ‘가을 손’, ‘개다리소반’, ‘돈대에게’, ‘목기’, ‘미시령의 말’ 등 다양한 작품이 수록됐다.

이 시인은 “필자의 명시선이 나오기까지 20권의 시집이 출간됐다. 첫 시집 ‘일식권’ 그리고 ‘가을 입문’이 나오기까지 난 몽당연필의 시간을 할애, 사랑과 기도로 구워낸 시를 외딴 산지기의 노래라고 했었다”고 밝혔다.

이 시인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등단했다. 한국문학상, 중앙시조대상, 육당문학상 등을 받았으며 한국시조시인협회장,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회장 등을 역임했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한국 시와 시조 시인 100명을 선정해 발간한 ‘한국대표명시선100’에는 한용운을 비롯, 김소월, 정지용, 백석, 윤동주, 김수영, 신동엽,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김영랑, 서정주, 천상병, 고은, 신경림 등 한국 대표시인이 망라됐다.
시인생각. 77쪽. 1만원.

●하늘색 점등인
팔순의 노 시인은 젊은 독자들에게 ‘디카시’로 말을 건넨다. ‘하늘색 점등인’은 이 시인이 직접 촬영한 디카 사진과 단수로 된 시조로 엮어낸 책이다. ‘설악동 이슬’, ‘물소리’, ‘갓 스물 겉말이’, ‘새가 열리는 나무’ 등 60편의 시가 실렸다.

그는 이미 ‘디카시’라는 이름으로 ‘꽃에게 바치다’, ‘풀꽃 시경’, ‘햇살 시경’ 등 세 권의 시집을 발간한 바 있다.

‘디카시’란 그의 정의에 의하면 디지털시대에 필름이 아닌 메모리칩을 통해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시를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그의 디카시에서 사진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니라 시와 사진이 함께 공존함으로서 비로소 디카시가 완성되는 것이다.

시와 사진의 콜라보레이션은  시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시를 잘 읽지 않는 요즘 세대에게 많은 공감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 크기 만한 책은 핸드백에도 쏙 들어갈 만한 앙증맞은 사이즈로 휴대하기 편리하도록 했다.

이 시인은 “사진과 시가 공존하고 상부상조하며 서로가 한몫을 하게 했다.

또한 배면의 색을 바꾸는 일 뿐만 아니라 영상을 단순화하고 기호화하는 압축미에 신선도를 높이는 디자인도 마다하지 않았다”며 “이제 내 눈도 노안의 한도를 적지 않게 느끼고 있다.

이 시집으로서 디카시의 대강과 끝손질을 다시 보여 드리고 싶다. 그 동안의 나의 노고(?)에 고마웠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고 밝혔다.

이근배 시인(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은 해설을 통해 “이상범의 정신은 나무에 열린 새처럼 자유롭고 그 감성은 층층이 무동을 타고 설악의 멧부리를 올려다보는 이슬처럼 맑다”며 “오랜 정신의 편력이 사물을 감추고 있는 우주적 의미??? 간파하고 언어로 조형해 내는 시적 성숙이 절정을 치닫고 있다”고 평했다.
고요아침. 152쪽. 1만2000원.
<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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