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은순(문학평론가)

 

 어느 휴일, 청주 인근에 있는 어느 조각가의 작업실에서 지인들 몇몇이 저녁을 먹게 되었다. 잘 알고 지내는 사십대 후반의 조각가가 중국 장춘에 있는 길림예술대학 특임교수로 가 있다가 강의를 마치고 며칠 전 들어와 함께 모여 후일담을 듣자는 취지였다.
 고기며 과일을 사 가지고 차를 몰아가는 가는 길은 무르익은 가을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황금빛 들녘, 코스모스의 행렬, 울긋불긋하게 단장한 단풍나무들이 이어지며 멋진 풍광을 자랑하고 있었다.
 몇 차례 와본 적이 있는 조각가의 작업실은 접근성이 좋아 큰 도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드나들기가 편했다. 큰 도로에서 들어와 그의 작업실로 들어가는 길목은 주황색 가을꽃들이 활짝 피어 있어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팔백 평 남짓 되는 그의 작업실은 앞이 시원스레 트였고 널찍한 정원 잔디밭에는 다양한 조각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따로 마련된 실내 전시실에도 그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어서 찬찬히 작품을 감상하며 모처럼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전부터 그의 작품을 좋아해 지난 여름에는 큰 맘 먹고 하나 구입해 남편의 일터에 놓아둔 적이 있고 다른 한 작품도 형편이 되면 사서 거실에 들여 놓으리라 벼르고 있는 참이었다. 천성이 철부지 어린애 같은 나는 좋은 예술품만 보면 사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인다. 형편을 생각해서 참아야 하는데도 좋은 작품을 소장하고 싶다는 욕심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잠시 마을길을 걸으며 산책을 했다. 야트막한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작은 마을은 가을 내음을 물씬 풍기며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무성하게 자란 배추밭, 주렁주렁 과실을 매달고 있는 감나무며 대추나무 등이 수확의 계절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마을길을 따라 동네 아이들이 강아지를 데리고 뛰어 다니는 모습을 보니 천진한 미소가 떠오르며 마음이 정갈해졌다.
 부엌 살림에 익숙한 조각가는 양은 냄비에 밥을 짓고 손수 잡았다는 미꾸라지를 손질해 튀길 준비를 했다. 한편에서는 숯을 피워 고기를 굽고 누군가 어렵게 구해온 송이버섯을 다듬었다. 작업실에 차려진 간이용 식탁에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데 배가 많이 고팠던 나는 냄비에서 밥을 퍼 열무김치와 허겁지겁 먹었다. 세상 어디서도 맛보기 힘든 기막힌 맛이었다. 중국에서 사온 술이며 일본에서 사왔다는 사케도 등장했다.
 한 학기 강의를 한 달 동안 몰아 강의를 마치고 온 조각가는 반응이 좋아 중국의 다른 대학에서도 강의 요청을 받았다고 했다. 입담이 좋은 그는 무슨 얘길 해도 재미있게 했고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가 소를 타고 다닌 얘기, 유난히 마음을 주었던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간 이후 오랫동안 소고기를 입에 대지 않은 얘기를 들으니 절로 마음이 동심이 되는 듯 했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 차를 마셨다. 오늘 참석한 지인 한사람이 차에 심취해 전국을 순례하며 매니아들과 교류를 하고 있다고 했다. 차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차에 대해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그 새로운 내용에 흠뻑 빠져 들었다. 다도일미(茶道一味)란 말이 인상적이었다.
 조각가가 중국서 특강를 마친 뒤 청중 한사람의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질문 내용이 남북관계에 대한 것이어서 통역을 하는 사람이 당황해 하더란다. 서슴없이 말을 받은 그가 다음과 같이 답변을 했다고 한다.
 “나는 정치가가 아니라 예술가다. 어딜 가든 내가 가는 곳의 주인은 바로 나다. 이곳 중국에 있으면 이곳의 주인은 나고 설령 북녘에 간다 해도 그곳의 주인은 나다. 가는 곳 마다 그곳의 주인이 되어 나의 예술을 펼쳐가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가인 나의 길이다.” 
 그의 답변에 청중들이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그의 예사롭지 않은 예술관을 보여준 답변이 아닐 수 없었다.
 물 흐르듯 정겨운 대화들이 이어지며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삶과 예술과 인정이 흐르는 낭만적인 가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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