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논설위원,시인)

 

#1: 단풍이 한창이다. 어느 산엘 가봤네. 어디가 좋네 하면서 한껏 달아오른 나들이 얘기가  단풍처럼 붉다. 풍요로워 흥겹고, 쓸쓸해서 아름다운 축제의 계절에 ‘문화의 달’이라는 이름표까지 붙은 10월이야말로 바람 든 풍선이다. 지난 주 모처럼 작은 모임에서 주관하는 산행을 따라나섰다. 평소 동네 야산도 꾀가 나서 뭉그적거리던 체력으로 신나게 고생은 했지만, 자연으로부터 얻은 감흥이 쉽게 삭아들지 않는다. 설악산 ‘흘림 골’ 코스다. 신선이 올랐다는 ‘등선대(登仙臺)’를 거쳐 오색약수터로 내려오는 코스였는데 허청거리는 다리가 갑자(甲子)를 돌아 온 세월의 단풍을 느끼게도 했지만 둘러보는 곳마다 시큰거리는 무릎통증을 보상받기에 충분했다. 햇살의 너울을 쓰고 흔들리는 단풍의 실루엣이 그렇고, 정상에서 맛보는 바람 한 모금에 삶의 지혜가 깨우쳐지기도 했다. 이심전심일까. 일행이 한 마디 거든다. “평생 돈 속에 묻혀 살았다는 정씨 할아버지도 이처럼 멋진 정원은 못 꾸며 봤을 걸.” 누군가 말을 받는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을 많다.’던 김 아무개 재벌총수도 여긴 못 와 봤을 거야. TV서 봤는데 베트남 자기 별장에서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은둔생활 하고 있는 모습이......혼자서 골프를 치면 뭘해. 그게 무슨 별장이야. 자신이 만든 감옥이지.”

맞다. 바다가 보이는 한반도의 동쪽, 백두대간을 따라가며 붕긋붕긋 솟아난 산들이 숲의 바다를 이루고 있는 곳. 지천으로 널려 있어도 질리지 않는 절경이다. 가을되면 스스로 철이 들어 붉게 물들 줄 아는 나무들이 있는 곳. 도토리묵에 하산 주(酒) 한 잔이면 누구나 신선이 되는 소박한 자유의 한 때를 위하여 건배.

 

#2: 오늘이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이다. 며칠간 찬비가 내렸다. 가을비 치곤 많은 양이다. 서늘한 기운을 받아 이슬을 맺는다는 한로(寒露)와 겨울을 알리는 입동(立冬) 사이, 꼭 이맘때쯤 늦가을의 허전함을 알리는 열여덟 번 째 절기가 상강이다. 가을 끝 겨울 시작, 그 중간쯤, 양력으로 10월 23일경. 여느 해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상강의 쌀쌀함이 올해는 유독 맘에 걸린다. ‘세월 호’의 상심(傷心)이 아직 문신처럼 남아있는데, 지난 17일, 판교테크노밸리 축제에서 일어난 ‘환풍구붕괴사고’가 또 다시 우리를 절망케 한다. 포미닛 공연을 보려던 16명의 생목숨이 꺼진 환풍구 속으로 사라졌다. 27명의 사상자가 새까맣고  찬 서리가 되어 우리들 가슴에 켜켜이 쌓이고 있다.

“‘세월호참사’로 304명이 죽었는데도 정부의 안전 시스템은 마련되지 않았고 판교 환풍구 붕괴 사고로 16명이 죽었는데도 지상파 방송은 너무나 평온하다. 얼마나 무고한 국민들이 죽어야만 정신을 차릴 건가?” 어느 네티즌의 장탄식이다.

 

#3: 2013년 12월 10일, 고려대에 “안녕들 하십니까.”하는 육필로 쓴 대자보가 걸렸다.

 


-철도 민영화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하루 만에 4,213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국가기관의 대 선 개입 의혹 있는 대통령은 ‘사퇴하라’는 말 한마디 한 죄로 ‘대통령탄핵소추권’이 있는 국회의원이 ‘제명’ 운운되는 지금이 과연 21세기 맞느냐고. 시골 마을(밀양)에 고압 송전탑이 들어서고 주민이 음독자살을 해도 그만이냐고, ‘먹튀’ 경영진에 대항한 해고노동자에게 수십억의 벌금과 징역이 떨어져도 가만 있어냐 하냐고. ‘88만원세대’라 일컬어지는 우리세대를 두고, 세상은 가난을 모르고 살아온 철없는 세대라 하고, 정치나 사회적인 문제에도 ‘무관심’을 강요받아 온 이 수상한 시대에 우리 모두들 안녕하시냐고.

당시 이 대자보를 내건 고려대 경영학과 4년, 주현우 학생은 오늘도 묻는다.

맘껏 즐겨도 되는 이 축복의 계절에 단풍놀이조차 주저하게 만드는 이 찝찝함은 무엇이냐고. 이 가을, 우리를 안녕치 못하게 하는 게 무엇인지 혹시 알고 계시냐고.

바람에 쓸리는 단풍이 되묻는다. “이 가을, 여러분들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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