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없는 죄인'된 포석의 수인 사진엔 진한 아픔이

▲ 우스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 1층에 마련된 ‘고려인 역사관’ 내부.

 (동양일보 김명기 기자) 최 예까떼리나는 포석과 ‘이중 인연’을 맺고 있다.

첫째, 그가 육성촌에서 학생으로 있을 당시 가장 존경하던 스승이 포석이었다는 ‘사제의 연’이다.

둘째 인연은 그가 포석의 처남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누이와 포석의 결혼을 성사시킨 황동민 교수가 포석의 처남이고, 황 교수의 부인인 최 예까떼리나는 처남댁이 되는 것이다.

최씨는 작고하기 전까지 내내 포석 조명희 선생에 대한 회고록을 ‘레닌기치’ 등의 매체를 통해 발표했다.

이 가운데 전해지고 있지 않은 최씨의 육필 원고를 찾게 된다면 포석에 대한 연구에 또 다른 진전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전시실 입구. 답사단은 이곳 고려인 역사관에서 조명희 선생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사실을 접하게 된다. 선생이 연해주 지역 고려인들로부터 ‘항일 투쟁 영웅 59인’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최 예까떼리나가 포석 관련 책 발간에 공을 들였다는 것을 주목해 볼 때 포석의 육필 원고나 미발표 작품들에 대한 발굴 가능성에 기대를 걸게 되는 것이다.

만약 포석의 작품들을 발견하게 된다면 앞으로 포석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고 정리하고 재조명하는 데 큰 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최 예까떼리나와 황동민 교수의 가계(家系)를 눈여겨 보고 있고, 최씨의 손자인 황 안드레이의 ‘역할’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 포석의 소련 망명 당시로 돌아가, 최 예까떼리나가 쓴 글에 나오는 포석의 모습을 살펴본다.

조명희가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들어올 때 한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소련군인들을 보고 어린이처럼 기뻐하며 달려가 그들에게 고려말로 나는 고려사람입니다, 하니 그들은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중국어, 일어, 영어로 말하였으나 그래도 군인들은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래서 군관이 병사들에게 국경초소로 호송하라고 명령하였다.

사흘이 지나 고려인 통역원이 블리디보스토크(해삼)에서 왔을 때 조명희는 자기 저고리잔등을 뜯어 거기서 종이쪽지를 꺼내어 통역원에게 보였다. 거기에는 “이 사람은 고려문사 조명희”라고 써있었다.

그것을 본 통역원은 반갑게 인사하고 해삼으로 데리고 가서 국제원조회에서 새 진회색양복을 내주었다.

그때 후리후리한 키에 맵시가 있던 진회색양복을 입은 조명희를 이 죄수복을 입고 찍은 사진과 비교해 보니 너무 대조적이다. 머리를 빡빡 깎고 죄 없는 죄인이 되신 조명희선생의 모습은 우리의 기억에 아픈 기억으로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최 예까떼리나 글, ‘레닌기치’ 게재.

여기에 나오는 ‘머리를 빡빡 깎고 죄 없는 죄인이 되신 조명희선생의 모습’은 1937년 하바로프스크에서 일제 스파이의 누명을 쓴 채 소련 KGB요원들에게 끌려가 이듬해인 1938년 총살형을 당할때까지 수인(囚人)으로 있던 포석의 사진을 말한다.

후손들과 포석 연구 학자들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포석의 누명을 벗겨 소련으로부터 신원회복을 시켰으며, 1990년대 이후 하바로프스크 KGB 본부를 찾아가 포석 선생의 신상명세서에 붙은 사진을 입수하는 큰 수확을 거두게 되었다.

이 일은 포석 선생의 장녀 조선아씨가 살아생전 남긴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한 열정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여하튼 조명희 선생의 소련 망명으로 인해 조선에 남아 있는 가족들은 크나 큰 고초를 겪어야 했다.

포석 선생에겐 본처 여흥 민식씨가 있었다. 둘 사이 2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장녀의 아들이 이번 답사단원 가운데 한 사람인 김왕규(76)씨다.

김씨는 외할아버지인 포석의 망명으로 풍비박산난 가정사에 대해 비교적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일제 때는 일본 경찰에 갖은 고초를 겪고, 해방 후에는 한국 경찰에게 시달렸죠. 연좌제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외할아버지와 관련된 무엇도 우리는 가지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지금 와 돌이켜 생각하면 그것이 너무나 안타까워요. 하지만 그때 외조부는 우리 가족에게 지우고 싶은 이름이었어요.

막내 외삼촌(조명희 선생이 조선에서 낳은 아들)은 열 여덟에 6.25 전쟁이 터지자 북한 의용군으로 끌려가 행방불명됐고, 나머지 가족들의 삶도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니었죠.

저에게 이복 이모가 되는 조선아(조명희 선생이 소련에서 재혼 한 황명희 마리아의 첫째 딸)씨를 처음 본 게, 그때 이모가 처음 방한했을 때인 90년이었고요.”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치인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적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가계(家計)였다.

지금이니 담담하게 말할 수 있지, 연좌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군사독재시절에는 감히 입밖으로 꺼낼 수도 없었던 이야기들. 질곡의 역사에서 파생된 지난한 삶의 상처들은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먹먹한 아픔으로 전해온다.

 

▲ 우스리스크에 있는 ‘고려인문화센터’ 전경.

답사단이 우스리스크에 도착한 것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지 1시간 30분 정도 된 후였다.

일행은 우선 고려인연합회와 고려일보사가 있는 고려인문화센터 건물을 찾았다.

김 발레리아(54)는 우스리스크에서 발행하고 있는 고려일보 편집국장이다.

고려일보는 2004년에 창간했는데, 해외동포재단에서 지원을 해주고 있다고 한다.

절반이 유가지(有價紙)고 절반은 무가지(無價紙)로 나간다고 한다.

기자 7명을 연해주 각 도시에 파견했는데, 프리랜서의 개념이라고 한다.

고려인문화센터도 한국에서 지원을 받아 건립됐다고 하는데, 깔끔하게 지어진 2층 건물로 1층은 전시실, 2층은 고려일보와 고려인연합회 사무실로 쓰고 있다.

한인 이주 150주년을 맞아 이것저것 신경쓸 일이 많다고 한다. 하면서 고려인연합회장 윤 스타니스라프(77)를 소개해 주는 걸로 일을 끝내버린다. 인터뷰도 응하지 않겠다고 한다.

자신은 포석 선생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며. 김일환 영사가 김씨와 연을 이어주며 “기대해도 좋은 성과물이 있을 것”이라며 건넸던 말과는 사뭇 다르게 진행된다.

그래도 그렇지, 손님 대하는 모양이 영 마뜩찮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객으로 찾아온 방문단의 선물이 마음에 차지 않았던 듯싶기도 하다.

방문단은 그때 진천 특산품이 종(鍾)과 한지로 된 인형 등속을 그들의 선물로 마련했었다. 그런데 그들이 바란 것은 찾아오는 객들의 정성이 아닌 돈이었던 듯하다.

그들이 그런 기대를 하게 된 것은 아마도 한인 이주 150주년을 맞아 한국에서 찾아오는 이런 저런 방문객들과 언론들이 그들에게 적잖은 돈을 건넸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한국에서 찾아오는 방문객들은 돈보따리를 들고 올것이란 그네들의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뀐 탓 때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연해주에서 태어났다는 고려인 연합회장 윤 스타니스라프(77)는 두 살되던 해인 37년 강제 이주 당했다고 한다. 포석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다. 하면서 툭 던지는 말, “1층 전시실엔 조명희 선생과 관련있는 게 있을지도 모르죠”라는 한마디.

불친절한 그들의 태도에 답사단은 매우 언짢아졌다. 잔뜩 품었던 기대는 급격히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든다. 이러다가 성과가 영 신통찮으면 어떡하나 하는 우려.

우스리스크로 오면서 답사단이 기대했던 것은 ‘증언’이었다. 이곳 고려인들 가운데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지로 강제이주 당했다가 다시 돌아온 나이 든 노인들이 꽤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100세를 넘긴 분들도 있다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우스리스크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거주하던 당시 조명희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들이 생생하게 전해는 육성을 기대했는데, 김 발레리아와 윤 회장은 답사단이 고령의 노인들과 만나는 자리를 마련하는데 난색을 표했다.

거동이 불편하다는 것이었는데, 답사단이 그분들의 집으로 찾아간다고 해도 자신들이 그런 시간을 내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주 바쁘기 때문이라는 핑계는 양념처럼 빼놓지 않는다.

▲ 윤 스타니스라프(맨 왼쪽) 고려인연합회장과의 인터뷰. 윤 회장은 한국말을 구사하지 못해 김 안드레이(앞줄 오른쪽서 두번째) 교수의 통역으로 진행됐다.

고려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책자가 있어 하나 집어들었다. 표지사진에 김정일과 김정은이 등장한다.
속 내용도 북한에 대한 정보와 찬양일색이다. 그네들이 한국 정부의 통제나 간섭을 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걸 두고 무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가져간다’는 옛 속담처럼, 고려인문화센터 건립을 한국에서 지원받았고 고려일보에 대한 지원도 한국으로부터 지속되는 상황에서 ‘이건 아니지’ 싶다.

그럴거라면 그네들이 한국으로부터 애초 지원을 받지 말았어야하고, 역으로 한국에서도 그들에 대한 지원을 끊었어야 하는 게 정도이지 싶은 것이다.

그들의 무성의하고 불친절한 태도에 울화통이 터지다보니 이런저런 시비라도 걸고 싶은 심정이었다. <매주 월요일 연재>

 

▲ 우스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등 연해주 지역 고려인들을 대상으로 발행하고 있는 ‘고려일보’.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