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살아 있어서 좋은 것은 내가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내가 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의 우상을 끌어내야 한다. 그리고 변할 바에는 뜨뜻미지근하게 변하는 것보다 화끈하게 변하는 게 좋다.

선생과 제자가 있었다. 선생은 제자에게 일만 시켰다. 어느 날 제자가 자신의 결심을 선생에게 알렸다. 가르쳐주지 않으니 떠나겠습니다. 선생은 곧장 제자를 데리고 가장 가난한 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 식구는 열 한 명이었다. 밤에 잠을 자는데 아랫목에 소가 자고 손님 둘이 더 와서 열 세 명이 자게 되었다. 한밤중이었다. 선생이 소를 죽이고 제자와 함께 달아났다. 몇 년 후에 선생과 제자가 그 집을 찾아갔다. 그 집은 대궐 같은 집으로 변해 있었다. 주인의 옷차림은 우아하였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선생이 물었다. 주인이 대답하였다. 소가 죽어서 한동안 울었답니다. 그러다가 굶어죽을 것 같아서 열 한 식구가 팔을 걷어붙이고 일을 해서 이렇게 부자가 되었답니다. (카밀로 크루소 ‘내 안에 소 있다’ 중에서)

우리 농촌에서도 소는 재산목록 1호였다. 사람은 굶어도 소는 굶기지 않을 정도로 극진히 여겼다. 일꾼 중에도 상일꾼이었을 뿐 아니라 교환가치도 최고였다. 소 팔아 자식 학비 대고 딸 시집보냈다.

이 이야기에서의 소는 그런 현실적인 소가 아니라 상징화된 소이다. 소만 믿고 일하지 않는 가족의 게으름을 꾸짖고자 하는 우상화된 소이다. 가족을 게으름에 빠뜨리는 우상인 소를 죽여야 가족의 미래가 희망적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이야기다.

우리들 안에도 소가 있다. 사람마다 그 안에 우상이 들어앉아 있다. 기복에 매달리는 신앙, 편견, 사전지식, 아집, 완고함, 이기심, 욕망, 허영심, 잡다한 지식, 설익은 지식 등은 모두 내 안의 소이며 우상이다. 그 우상인 소를 끌어안고 있는 한 절대 변화할 수 없다. “네 안의 부처를 죽여라”라는 말은 이런 우상을 죽이라는 말이다. 내 안의 우상을 끌어내어 내 안을 비워내는 것이 진정한 지혜이며 희망으로 가는 출발점이다.

나비는 알(탄생) - 애벌래(성장) - 번데기(죽음) - 성충(재생) 이와 같이 네 번의 탈바꿈을 하며 살아간다. 사람의 시간은 늘 후회가 남기지만, 나비의 시간은 단계마다 삶 자체에 충실하여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 무덤 같은 번데기도 그 안에서 근육을 키우고 날개를 키우는데 온 힘을 쏟는다. 번데기라는 탈이 열리는 순간 또 다른 세계에서의 삶에 충실할 뿐 과거를 되돌아보지 않는다. 번데기 시절은 완벽하게 잊고 고운 빛깔의 날개를 달고 짝과 함께 할랑할랑 공중을 비상한다. 그 가벼운 영혼이 부러웠을까. 장주는 ‘나비가 되어 나는 꿈’을 꾸고, 부처는 브라만 경전에서 배운 것보다 나비한테서 더 많이 배웠다고 고백한다.

사람도 한 생애를 살면서 몇 번의 탈바꿈을 한다. 탄생-유년기-사춘기-청·장년기-노년기를 거치며 거듭난다. 그 과정 중에서 가장 화려한 탈바꿈은 결혼이다. 결혼의 순간은 나비로 변화하는 순간이다. 부부 중심의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순간이다. 그 첫 사업이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이다.

사람에겐 생물학적인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신적인 변화이다. 정신적인 변화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 자식과 배우자 그리고 물질적인 여건이 다 갖춰져 있어도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않으면 외로움을 느끼는 게 사람이다. 사람은 육체적으로 병이 들어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외로워서 죽는다. 주위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 데도 외로운 게 사람이다. 끊임없이 변화와 진화를 거듭하지 않으면 평생 외로움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변화하되 나비처럼 한순간에 완벽하게 변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완벽한 변화란 겉모습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속 모습까지 변화하는 것이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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