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자(수필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10월 상달, 하늘이 한없이 높고 푸르러 문득 고향이 그리워지던 날, 옥천을 향해 달리는 차안에는 이동원과 박인수가 번갈아 부르는 정지용의 ‘향수’ 가 그윽하게 울려 퍼진다,

  도심을 벗어날수록 자연의 아름다움이 가까이 다가와 눈을 두는 데마다 단풍 곱게 수놓은 금수강산이다. 흠뻑 물이든 샛노란 은행나무 가로수는 바람이 불적마다 은행잎 포르르 시(詩)를 써 내려 간다. 질세라 느티나무가로수는 저마다 갖가지 색깔로 곱게 치장 하고 나와 가을을 합창한다. 참으로 좋은 축복의 계절이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가을 햇살은 따끈따끈하고, 넓은 벌 황금들판은 띄엄띄엄 벼를 벤 빈 논들이 눈에 들어온다. 거기서 이삭 줍던 흰 옷 입은 선한 아낙들이 보일듯하고 황소의 긴 울음소리가 들려 올 것만 같아 유정해진다.

  우리를 태운 차는 정지용 생가 앞에 발길을 멈추었다. 정겨운 돌담과 조신하게 엎드린 초가지붕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순해진다. 사립문을 들어서자 감나무에서 제물에 농익어 떨어진 홍시가 발길에 차인다. 안채 옆구리에 우물이며 장독대, 세월이 묻어나는 돌절구, 나무절구가 시간을 100년 전으로 끌고 간다. 고즈넉한 뜰에 서니 마루에 놓인 다듬잇돌, 안방에 놓인 약을 달이던 풍로, 등잔, 약장, 책상들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농사꾼이 아닌 약국집 아들 정지용 시인의 사진 속 눈매가 깐깐하면서도 예리해 보인다. 그래서 그는 안으로는 뜨겁고 겉으로는 서늘한 시를 썼던 것일까. 이곳이 바로 국민의 시 ‘향수’를 낳고 절창의 아름다운 시(詩)의 씨앗들을 품었던 곳이니 문고리하나도 무심히 보이지 않는다. 14살에 집을 떠나 타향살이를 했으니 고향에 대한 어릴 적 기억들을 작품 속에 녹여냈으리라. 열두 살 어린 나이에 결혼 했다는 것 또한 특이한 일이다.

 


  생가를 나와 담 너머에 자리한 정지용 문학관을 들어서니 100년의 시간을 다시 훌쩍 뛰어넘어 온 듯 현대적인 느낌이다. 정지용의 삶과 문학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 현대시의 발전사가 한눈에 펼쳐진다. 독특한 언어와 신선하고 섬세한 묘사로 현대시의 경지를 새롭게 일구어 놓은 빛나는 업적 앞에  숙연해진다. 정 시인에게 추천을 받은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박남수, 이상, 윤동주, 기라성 같은 시인들을 키워 낸 공로 또한 지대하다. 두루마기 입고 앉은 지용시인의 동상 옆에 앉아 사진을 찍으며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당신으로 하여 우리는 행복합니다.’

  문학관 앞 실개천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휘돌아 나가고, 맑은 물에 파란하늘이 비치고 흰 구름이 유유히 흐른다. 개천가에 세운 철책에도, 다리 난간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시(詩)들이 감성을 일깨운다. 옥천은 가는 곳마다 시의 물결이다. 옥천역에, 음식점에, 마트에, 미용실에, 우체국에, 가게에, 정미소에, 담벼락에 온통 시들로 넘쳐난다. 옥천 사람의 가슴 속에는 시들이 가득 자라고 있으니 시 한자락 외지 못하면 옥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옥천이 이토록 아담하고 작은 도시이기에 정지용 시인만을 위한 고장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다. 대도시로 개발되어 빌딩 숲이 들어서고 자동차의 물결이 거리를 채운다면 고향 냄새도 ‘향수’의 분위기도 다 사라지고 빛나는 시어들은 소음 속에 묻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육영수 여사의 생가에 들러 삼정승이 살았다는 그 집의 위용을 보며 옛날 부자의 풍요로움을 실감한다. 사진으로나마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만나고, 잊고 살았던 역사의 뒤안길을 둘러보고 나니 만감이 교차된다.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걷고 싶었던 향수길 30 리는 시간에 쫓겨 그냥 마음에만 담고 오면서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한다. 내 고향은 아니라도 고향 같은 옥천에서 고향 냄새를 맡고 고향사람들을 떠올리며 시의 바다에 흠뻑 빠져본 하루가 충만한 행복감으로 채워졌다. 돌아오는 길에서는 저절로 시가 지줄거려 진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려뇨/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마음은 제 고향 지나지 않고/머언 하늘만 떠도는 구름….

  고향이 그리운 사람들은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옥천으로 가 보세요.

  시(詩)를 머금고 시에 취하고 싶은 분들은 옥천으로 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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