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숙(논설위원 / 사회학박사)

 

1859년 스위스의 청년실업가 장 앙리 뒤낭(Jean Henri Dunant)은 사업상의 용무로 나폴레옹 3세를 찾아갔다가 이탈리아 북부 솔페리노 들판에서 사르데냐 왕국과 프랑스 동맹군이 오스트리아 군대를 격파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였다. 적십자운동은 그 때 자신이 직접 부상자를 구호했던 체험을 회상하면서 그 어떤 명분으로도 인간의 희생은 막아야하고 만일 전쟁 자체가 불가피하다면 전쟁으로 인한 부상자 구호를 위한 민간 구호단체 설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1862년 <솔페리노의 회고>를 출간하면서 시작되었다.
뒤낭의 제안에 공감한 많은 사람들이 구체적인 조직건립 운동을 시작하였고 1863년 10월 제네바에서 열린 창립회의에서 전시부상자구호를 위해 군위생부대의 보조기관으로서 스위스에 국제적십자위원회와 각국에 적십자사를 설립하고, 적십자사와 그 소속 간호요원에게는 중립적 지위를 인정하여 국제적 보호를 부여할 것을 결의하면서 적십자가 창립되었다. 이 때 간호요원이 패용하는 만국공통의 표장으로 스위스 국기의 배색을 반대로 한 ‘흰 바탕에 붉은 십자’가 채택되었는데 그것은 적십자 창시자인 뒤낭의 조국에 대한 경의를 표한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1905년 10월 27일 대한제국의 칙령으로 ‘대한적십자사규칙’이 최초로 공포되었고 1919년 7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대한적십자회가 발족되었다. 8·15광복 후 1949년 4월 30일 공포·시행된 법률 제25호 ‘대한적십자사 조직법’에 의거하여 그해 10월 27일 현재의 대한적십자사가 재조직되었고, 1955년 9월 28일 국제적십자연맹의 회원국이 되었다.
대한적십자사의 주요활동은 전시(戰時)에는 적십자조약인 제네바협약에 입각하여 국군의 의료보조기관으로서 부상자치료를 기본임무로 하고, 평시에는 구호활동, 사회봉사활동, 지역보건활동, 안전교육활동, 인도주의이념보급, 청소년적십자, 국제협력사업, 남북교류활동, 혈액사업, 병원사업, 특수복지사업 등의 인도적 임무수행으로 명시되어 있다.
필자는 중학생시절 학교의 청소년적십자(당시에는 JRC, 현재는 RCY) 단장으로서 ‘건전한 마음과 몸,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이웃과 나라, 인류 평화를 위해 활동할 것’을 맹세하고 청소년적십자 지역본부에서 봉사활동과 인도주의를 배운 사람으로서 작금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김성주 신임 적십자사총재의 무분별한 언행과 리더십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특히나 취임식에서 이루어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적십자회비 미납' 논란과 관련하여 사과는 커녕 본인이 적십자 회비를 내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만큼 적십자사가 잊혀진 봉사단체가 됐다"고 발언했다니 이것은 안타까움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동안 대한적십자사는 적십자에 관한 국제적인 조약과 인도적 임무를 바탕으로 정부나 민간이 수행하기 힘든 중요한 사업들을 전개해 왔다. 1958년 대한적십자사혈액원을 개원으로 시작한 헌혈운동과 각종 재해나 질병에 대한 구호활동은 물론이고, 1983년 남북이산가족찾기 운동, 1989년 사할린동포고국방문 추진, 1997년 베이징 제2차 남북적십자실무대표접촉 등으로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가의 고통을 덜고 평화를 유지하려는 대한적십자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한동안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굵직한 적십자의 활동이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서 여전히 우리사회의 대표적인 공공구호기관이자 대북인도사업기관이고 남북교류와 국제관계의 중요한 창구인 대한적십자사가 잊혀진 봉사단체로 취급 받아서야 되겠는가.
김성주 신임총재가 국정감사거부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고 나서 국감에 출석한 10월 27일은 공교롭게도 대한적십자사가 창립 109주년을 맞은 날이었다. 취임 때부터 시작된 일련의 스캔들로 많은 국민들이 실망과 회의를 느꼈고 적십자의 사회적 신임까지 곤두박질했지만 우리는 대한적십자사가 총재는 물론 어느 개인의 단체가 아님을 상기해야 한다. 적십자는 특수법인이지만 민간인들의 기부와 봉사로 운영되는 봉사단체이고, 우리가 납부하는 적십자 회비는 돈의 액면가만으로는 그 가치가 평가될 수 없는 사랑과 봉사의 작은 실천인 것이다. 적십자는 언제나 더 낮은 곳, 더 힘든 곳, 더 절실한 곳을 향해 사랑과 봉사라는 적십자의 이념으로 인도주의를 수행하여 우리의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에게 희망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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