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 조명희 선생은 ‘항일투쟁영웅 59인’이었다

▲ 우스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 1층전시실에 있는 ‘항일투쟁 영웅 59인’의 패널. 항일투쟁 영웅 59인에는 포석 조명희를 포함해 안중근(1879∼1910년), 신채호(1880∼1936년), 이동휘(1873∼1935년), 이범진(1852∼1911년), 이상설(1871∼1917년), 박은식(1859∼1925년), 이동녕(1869∼1940년), 홍범도(1869∼1943년) 등이 있다. 맨 아래 왼쪽서 두번째가 조명희 선생이다.

 

(동양일보 김명기 기자) 마음을 추스리고 1층 전시실로 내려갔다. 고려인연합회로부터는 어떤 정보도 얻어낼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시간만 허비한 꼴이었다.
그나마 전시실에는 한인의 이주 역사에 대한 패널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답사단은 전시실에서 그토록 찾으려 했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뜻밖에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그곳에는 조명희 선생이 ‘항일 투쟁 영웅 59인’의 명단에 들어가 있었다. 그들이 왜 그런 사실을 답사단에 알려주지 않았는지, 혹은 조명희 선생이 고려인문화센터 전시실에 전시돼있는 인물인지 애초부터 알고있지도 못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의 행태는 형편없는 것이었다.

포석이 망명하게 된 것이 일제에 가장 치열하게 항거하면서 더 이상 조선에서 발 딛고 살 수 없게된 까닭이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가 연해주 지역 고려인들이 꼽은 항일 투쟁 영웅 59인에 속한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답사단원들은 가슴이 뛰었다. ‘큰 건’ 하나 제대로 했다는 뿌듯함도 들었다.
항일투쟁 영웅 59인에는 안중근(1879∼1910년), 신채호(1880∼1936년), 이동휘(1873∼1935년), 이범진(1852∼1911년), 이상설(1871∼1917년), 박은식(1859∼1925년), 이동녕(1869∼1940년), 홍범도(1869∼1943년) 등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니까 포석은 시인, 소설가, 희곡인, 번역가, 동시작가, 평론가 등의 타이틀과 함께 ‘항일 투쟁 영웅’이라는 새로운 위치를 점하게 되는 셈이다.

▲ 고려인문화센터 전시실 내부. 왼쪽이 소비에트 공훈 20인, 가운데가 항일투쟁 영웅 59인, 오른쪽이 러시아 공훈 고려인 32인 패널이다.

그러면 포석 조명희가 항일 투쟁의 영웅으로 선정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그렇게 선정된 이유와 당위성을 찾는 것이 중요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론했다.
첫번째, 그의 작품은 시종일관 일본의 압제에 항거하는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대표적 소설 ‘낙동강’이 그렇고, 그의 대다수 시들도 항일적 색채를 띠고 있다. 소련으로 망명한 뒤의 작품들은 더욱 치열한 항일 정신을 표출하고 있다.
두번째, 최초의 소련 망명작가인 그는 연해주 지역 한인들 세력의 구심점으로서 민족과 민중의 의식 계도에 앞장섰다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조명희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스리스크, 하바로프스크에 거주하면서 이 지역 한인들의 정신을 선도하고, 또 이들을 계도할 중등교사를 양성하는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정신적 지주로서의 큰 역할이 항일 투쟁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유가 될 듯도 하다.
일례로, ‘백두산 호랑이’로 일컬어지는 홍범도 장군은 포석 조명희 선생의 글을 읽고 크게 감명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홍범도 장군은 조명희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독립군 대장이 되었노라 술회했다. 그만큼 포석의 사상과 항일정신은 조선의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당대를 증언할 수 있는 이들이 100세 쯤 된다고 보면, 세월이 너무 흘러 그들은 모두 가고 그들의 증언을 녹취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게 됐다. 하지만 연해주를 중심으로 한 독립투쟁에서 조명희의 역할이 무장투쟁이었든 한인들의 정신적 계도를 통한 인재 양성이었든,  어느 쪽이었든 포석이 깊게 관여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그 1세대들의 ‘증언(證言)’을 듣고 자란 2세대들의 ‘전언(傳言)’을 수집하는 것이다.
세번째, 선생이 행한 독립운동이다. 나순옥 포석기념사업회장이 이와 관련해 말했다.
“2010년도에 작고하신 조중협(조철호 단장의 부친) 선생이 저에게 1919년 3.1운동 당시 조명희 선생이 진천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3개월의 옥고를 치른 바 있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우리 포석기념회는 그 증거를 찾기 위해 앞으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특히 조중협씨에게 조명희 선생은 숙부가 된다. 그만큼 가깝다. 가깝기 때문에 더욱 정확하다 할수 있다. 포석과 관련해 교차되는 증언들 모두 진천지역 3.1 만세운동이 포석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숙제가 하나 더 생기게 된다.
조명희 선생이 만세운동을 주도해 옥고를 치른 공식적인 기록을 찾아야 하는 것이 그것이다. 독립기념관 등 관련 기관으로부터 포석의 3.1만세운동과 관련된 기록을 찾는다면 항일 투쟁영웅으로서 포석의 위상이 더 한층 높아질 것이다.
포석이 하바로프스크에서 억울한 총살형을 당한 지 벌써 76년. 그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의 정신은 연해주 지역 한인들의 가슴에 오롯이 남아 항일 투쟁영웅으로 각인돼 있었다.

▲ 포석이 황명희 마리아와 재혼하면서 륙성촌에서 우스리스크로 이사한 뒤 1931년부터 1935년까지 조선어문학을 가르쳤던 고려교육전문학교.

우스리스크시 아게예바 거리 75번지에 있는 고려교육전문학교를 찾았다. 현재 주소는 차체리나거리 54번지로 돼 있다. 이 학교는 조선사범학교라고도 한다.
이 학교가 설립된 것은 1918년. 전로한족회중앙총회의 주도로 중등학교인 조선인사범학교로 설립됐지만, 1920년 일본군에 의한 ‘4월 참변’으로 폐쇄가 되었다가 다시 개교 됐다. 1924년까지는 러시아 학생들도 다닌 일종의 혼성사범학교였다. 시베리아 내전 종결 후에는 러시아교육전문학교의 조선과로 개조되었다가 1926년 고려교육전문학교로서 정식 설립된 이후, 1936년까지 10년동안 교원 244명을 배출하였다. 블라디보스톡의 고려사범대학과 함께 한인교사를 양성하여 각급 한인학교에서 한인제자들을 가르치게 했다.
그러니까 포석이 처음 교수라는 직함을 갖게 된 것은 이 학교에서 교원을 양성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포석의 망명 행적에서 이 학교는 세번째 정착지가 된다.
1928년 8월 소련으로 망명하여 첫 정착지로 삼았던 곳이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이었다. 이듬해인 1929년 우스리스크에서 100여㎞ 떨어진 륙성촌에서 교편을 잡으며 두번째 정착지로 삼았고, 1931년 황명희 마리아와 재혼한 후 우스리스크로 이사하여 조선인사범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한 것이 세번째 정착지인 이곳이었다. 그리고 1935년 하바로프스크로 이사하여 ‘작가의집’에서 생활하다 총살형을 당할 때까지의 삶이 네번째 마지막 정착지라 할수 있다.
학교는 깔끔했다.
3층 건물이 ‘ㄷ자형’으로 돼 있는데, 청결하다는 첫 인상을 준 우스리스크처럼 학교 또한 청결했다.
감회가 새롭다. 학교 교장이 답사단을 맞아 세심한 설명을 곁들여 주었다. 옛날에는 ‘一자형’이었던 것을 증측해 ‘ㄷ자형’이 됐다고 한다. 학교 복도를 지나다 보니 불룩 튀어나온 것이 보인다. 덧댄 흔적이다. 포석은 이 학교에서 1931∼1935년까지 4년 동안 조선어문학을 가르쳤다. 교실을 돌아보며 그가 장차 교원이 될 조선의 인재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떠올려 봤다.

고려인 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기로 했다.
집 떠나면 집밥 먹고 싶고, 고국 떠나면 고향의 맛이 그리운 법. 오랜만에 먹게되는 한식. 설레는 마음은 어쩔수 없는 일.
김치와 깍두기가 나왔다. 깍두기는 모양이 우리와 같은데 향신채가 첨가돼 있어 맛은 차이가 났다.
김 안드레이 교수가 자신의 어머니 조선아(조명희 선생 장녀)씨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답사단에 들려 주었다.
“스탈린 강제 이주 정책은 ‘일민족일국가(一民族一國家)주의’에 의한 것이었어요. 하나의 국가에 하나의 민족만이 존재한다는 거죠. 그런 정책 때문에 타 민족은 배척받고 탄압받으며 죽어갔습니다. 고려인도 마찬가지였어요. 까레이스키로 통칭되는 한민족은 대부분 연해주 지역에 거주해 있었는데,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수십만명이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지로 쫓겨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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