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논설위원 / 시인)

 

차가운 가을비가 옷깃을 여미게 한다. 바람에 쓸리는 낙엽에도 쓸쓸함이 한껏 묻어난다.
겨울 시작, 입동(立冬)이 내일이다. ‘아니 벌써’ 굳이 말을 안 해도 짠한 외로움이 느껴지는 시기다. 계절이 주는 스산함이 자연스레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때다. 그렇다. 사색의 강이 흐르다 멈칫 거리는 곳은 언제나 ‘죽음’이라는 샛강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통교(通交)를 믿었던 신(神)들의 나라 이집트, 나일 강변 서쪽엔 ‘죽은 이들을 위한 도시’가 있다. 블록으로 쌓아올리다 만 것 같은 빈민촌(무덤)이 늘어서 있다. 실제로 10만이 넘는 부랑인들이 이 무덤 군(群)을 은신처로 살고 있다고 한다.
파라오는 왕위에 오르는 순간부터 자신이 죽은 후에 살아갈 신의 무덤을 만드는 일에 전 생애를 바친다. 짧은 생의 부귀영화를 내세에 까지 이어가려는 갈망의 흔적이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로 남아있다. 살아있는 신(파라오)의 절대 권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죽음’은 결국 ‘사자(死者)의 서(書)’에 실려 죽음의 세계를 다스리는 ‘오시리스(Osiris)’ 신(神)에게로 넘겨진다.

삶과 죽음이 하나의 강줄기에서 비롯함에도 우리는 ‘죽음’을 잊고 산다. 살아있는 매 순간순간이 죽음과 맞닿아 있음에도 애써 외면하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자웅동체(雌雄同體)의 불가해(不可解)한 명제에 대해 명쾌한 답은 없다. 무릇 생명을 가진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과 그때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두 가지 진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단언컨대, 수천, 수만 년의 인류역사 속에서 죽음의 강을 건너갔다 온 사람은 없다.
믿거나 말거나 식의 ‘사후세계’나 ‘임사체험’을 얘기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단지 죽음에 대한 올바른 ‘받아들임’ 없이는 삶은 그 자체가 허무요, 무의미하다 할 것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다. 라틴어로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를 가진 낱말이다.
고대 도시 폼페이에서 발굴된 모자이크 그림 중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가 있다.
해골 추가 달린 직각의 측량 자(尺)가 있고 자의 양쪽 끝에 두 가지 물건이 균형을 이루며 매달려 있다. 왼쪽에는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것들, 오른쪽은 가난을 상징하는 것들이 매달려 있다. 중요한 것은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똑같은 무게를 가진다는 점이다. 기원전 30년경에도 모자이크 그림을 통해서 계도하려고 한 ‘죽음’의 참된 의미는 지금과 다르지 않다.
옛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의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메멘토 모리!"를 외쳤다한다. 승리에 취해 자만하지 말고,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유한적 존재임을 일깨워 주어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주문을 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클레르보(Clairvaux)에 ‘시토 수도회’가 있다. 1098년 창설된 이 수도회는 엄격하기로 소문 나 있다. 계율을 준수하고 ‘절대침묵’을 유지하는 가운데 기도와 명상, 노동이 생활의 전부인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말이 ‘메멘토 모리’라 한다.

‘죽음을 기억하라.’ 이보다 더 큰 명상거리가 있을까. 성공한 인생의 삶의 가치는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에 달려있다. 100세 시대에 100세를 꽉 채웠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성공한 삶이라 할 수 없다. 죽음에도 질(Quality of Death)이 있다.
'좋은 죽음'에 대한 기준도 있다. 1)익숙한 환경에서 2)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한 채 3)사랑하는 가족, 친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4)고통 없이 죽어 가는 것이 그것이다.
깊어가는 계절, 하나둘 나뭇잎을 내려놓고 겨울채비를 하는 11월의 나목(裸木)에서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죽음’은 가장 가까운 내 생의 동반자다.
 “메멘토 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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