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풍한설 추위에 스크럼을 짜 아이들 생명 지켜내

 
▲ 우스리스크에 있는 고려교육전문학교 건물(위 사진)과 교실 내부. ‘ㄱ자’로 꺾이는 지점 왼쪽이 포석이 가르쳤던 교사(校舍)이고 오른쪽이 이후 증측하면서 덧댄 건물이다.

(동양일보 김명기 기자) 스스로를 ‘국수주의자’라로 칭하는 김 교수는 맺힌 한이 많은 이였다.

“어머니는 외할머니(황명희 마리아)와 함께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건너 황폐한 땅 중앙아시아에 수많은 한인들과 함께 버려졌어요. 장정들은 땅을 파고 갓난 아기들을 그 속에 들어가도록 했답니다. 찬이슬 가릴 수 있는 지붕조차 없이, 북풍한설 막을 벽도 없이 허허벌판에서 그 추위를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우선 땅이라도 파서 그 안에 노약자와 아이들을 먼저 삭풍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전부였답니다. 맨 가장자리에는 장정들이 스크럼을 짜서 긴긴밤을 버텨냈어요. 그렇게 해서라도 찬바람을 막아보자는 것이었죠. 하룻밤을 지나고 나면 깔려죽은 아이가 몇 명씩 나오는 거예요. 그때 상황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희생이었다고 합니다. 다음날, 또 그 다음날 장정들은 며칠 동안 둔덕을 더 파서 움집으로 만들었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혈거생활과도 같은 생활을 했다죠. 어머니(조선아씨)와 외삼촌들(조선인, 조 블라디미르)을 그렇게 땅 구덩이 속에 넣어 그해 겨울 겨우 살아났다고 해요. 스탈린이 그렇게 한 거죠. 갖다 버린 거예요, 죽으라고. 그 길고 긴 밤 스크럼을 짜며 추위를 막아내던 그 청년들도 속절없이 죽어갔답니다. 용감했던 그들의 시체를 묻으며 고려인들은 무척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목숨이 모질어 살아난 거지, 우리 민족이었으니 그나마 생존해서 새 삶터를 일군 것이지, 그 고통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후로 독일인, 터키인, 체첸인 등 60여개의 민족이 강제 이주를 당했다고 한다. 김 교수의 어머니 조선아씨는 김 교수가 어렸을 적 울면서 그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한다.

1937년 KGB에 의해 강제 연행된 포석은 행방을 알수 없게 됐고, 나머지 가족들은 그해 가을 강제 이주를 당했으니, 그때 포석의 장녀 조선아씨 나이는 여섯 살, 장남 선인씨의 나이는 다섯 살이었고, 막내 블라디미르는 같은 해 8월 12일에 태어났으니 두 세달밖에 안되는 갓난아기였다.

하고보면 조명희 선생이 스탈린에 의해 억울하게 총살형을 당하고서도 가족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던 셈이다. 오히려 그때부터 그의 가족의 고난과 시련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안타까운 이야기를 김 교수는 덧붙인다.

“서리가 대단히 많이 내렸다고 해요. 그걸 청년들이 몸으로 전부 막아냈던 거예요. 스크럼의 맨 밑에 깔려있던 아이들은 질식사하기도 하고… 그 긴 밤 체온으로 서로를 견뎌내며 살아났다고 해요. 방비도 하나 하지 못한 상태에서 화차에 태워 시베리아 벌판을 횡단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끌려간 것이었으니, 그런 상황에서 살아난 것이 기적이었다는 것이죠.”

▲ 골프를 즐기고 있는 러시아인들의 캐디로 나선 한인 아이들. 1920∼1930년대 연해주 지역은 골프를 즐기는 이들이 있을 만큼 물산이 풍부하고 경제적으로 풍족했다. 그러나 연해주로 건너간 한인들은 그들의 뒷바라지로 돈을 벌어 생계를 이어가야할 형편이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한식, 아니 고려식이 입맛을 당겼다. 비록 우리 고유의 맛과는 조금 달랐지만, 한식에서 변형된 그들의 식문화에는 나름의 애환과 슬픔과 기쁨과 환희가 교차했을 것이다.

한인 이주 150주년이 되도록 카레이스키의 변하지 않은 한 가지를 꼽으라면 그것은 김치였다. 누가 지켜서가 아니라 그들은 그들 스스로 자연스럽게 ‘김치 식문화’를 이어왔다. 슬라브족에게는 낯설기만 한 이 김치 쪼가리는 슬라브족들로부터 까레이스키를 변별시켜주는 상징이었고, 1930년대 후반 스탈린 정권의 한국어 말살정책으로 그들이 우리말을 다 잃게됐어도 까레이스키를 하나로 묶어주는 연결고리이기도 했다.

그 정도의 생각을 가져보니 우리 김치와는 맛이 조금 다른 그네들의 김치가 먹을만 했고 대견스러워졌다.

고려인 식당 종업원들은 고려인들이었다. 모양새는 우리와 똑같은데 말은 통하지 않았다. 갓 스물 넘은 젊은 아가씨들이니 그들에게는 한국말을 배울 기회도 방법도 없었을 터. 한국인이 한국음식을 한국인에게 시키면서도 통역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조금 씁쓸했다.

비빔국수와 육개장, 곰탕 등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서둘러 일정을 맞춘다고 하면서도 이것 저것 세심히 살펴야 할 것이 많다보니 시간이 자꾸 늦춰졌다. 고난의 강행군, 점심을 먹고 나니 오후 4시다. 시간상으로 여유가 없다. 륙성촌을 찾아가야 하는데, 그곳까지 대략 1시간 정도 소요되는 것을 감안하면 왕복 2시간에, 우스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숙소까지 돌아가는 1시간 30분 정도를 얹으면 3시간 30분. 륙성촌을 둘러보는 시간을 적게 잡아 2시간 쯤으로 계산하면 5시간 30분이 소요된다.

호텔에 도착하는 시간이 그러면 10시 30분이 넘는다는 이야기다. 답사단은 이 문제를 두고 잠깐 의견을 나누었다. 내일 여유있게 다시 찾아오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부터, 이왕 예까지 왔으니 강행군으로 마저 끝내자는 의견 등 분분했다. 다음날 일정을 보니 오후 6시 5분에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하바로프스크 행 비행기를 타는 것으로 돼 있다. 저윽이 걱정되는 부분은 답사단원 중 70세 이상되는 분이 세 분이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강행군으로 인해 그분들이 탈이나 나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 가장 걱정되는 것이었다.

분분한 의견을 조철호 단장이 깔끔하게 정리했다.

“여행이란 게 빠듯하게 밀고 나아가야만 할 땐 밀어붙이는 거고, 또 쉴 때는 날 잡아 푹 쉬는 것. 한번 밀어붙여봅시다.”

70세 넘은 김왕규씨 부부에게 동의를 얻어 ‘렛츠 고, 쁘찔로프카’.

내일 남는 시간은 딴 곳으로 이전한 극동대를 방문해 조명희 문학비에서 분실된 동판의 소재를 파악하고 세심한 관리를 부탁하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

 

답사단은 늦은 점심을 끝내고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륙성촌으로 향했다.

마을을 새롭게 육성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 륙성촌은 러시아어로 ‘쁘찔로프카’였다.

륙성촌은 조명희 선생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929년에 건너와 1931년까지 2년 정도 살았던 곳이다. 인근에 있는 우스리스크에서 1931년부터 1935년까지 4년 동안 살았던 것을 더하면 6년 동안 이 지역에서 교사와 교수로 살았던 것이다.

포석이 1928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첫발을 디딘 이래 1938년 하바로프스크에서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10년 동안 망명생활을 했다고 볼 때, 그 생활의 6할이 이 곳에서 이뤄졌다고 보면 된다. 그만큼 이 지역은 포석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스리스크 등 연해주 지역에 정착한 한인 노동자들.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잡초 벌판. 이 곳을 봐도 잡초 지평선, 저 쪽을 봐도 잡초 지평선이다. 이따금 농지가 나오기도 하지만 조족지혈. 이 넓은 땅을 아깝게 놀리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되레, ‘아, 러시아가 넓긴 넓구나’ 하는 감탄을 하게 된다.

승합차를 몰던 기사는 한국에도 몇 번 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는 한국 사람들을 보면 고향 사람 만난듯 반갑다고 했다. 서른 중후반인데 몸이 날래고 생각하는 것도 스마트한 친구였다. 그런 친구가 벌써 몇 번째 헤매고 있다.

이쪽 길로 갔다가, ‘이 길이 아닌 게벼’ 다른 길로 가고, 그 길로 갔다고 ‘아까 길이 맞는 게벼’ 왔던 길로 되짚어 가고. 이따금 지나가던 차량조차 뚝 끊겼다. 내비게이션이라도 있으면 검색 하나로 모든 게 뚝딱 해결되련만, 여긴 그런 것도 없다. 온전히 물어물어 찾아가야 한다. 신한촌에서 옛 건물을 찾을 때에도 그렇게 고생을 했었다.

답사단원들이 한마디씩 툭툭 던진다.

“오늘 안에 가기는 가는 겨?”

“아무려나 저 똑똑한 친구가 길 잃고 헤매다 우리 일정 통째로 말아먹기야 하겠어?”

“그래도 모르지, 저 친구가 헛똑똑이인지. 이 넓은 벌판에 이정표도 하나 없는데, 게다가 륙성촌이 초행길이라던데, 륙성촌을 찾기는 커녕 돌아갈 길조차 못찾아 우리가 미아신세가 될 수도.”

‘슬라브족다운’ 얼굴을 한 승합차 운전기사는 얼굴이 참 잘 생겼다. 싹싹하고 붙임성도 좋아 특히 여자 탐사단원들의 인기를 독차지했었다.

갈색의 깊고 맑은 눈망울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는 답사단원만 보면 늘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즈드랏스 부이쩨(안녕하세요)”라고 인삿말을 건네왔다. 조금 신경이라도 써 주면 “블라가다류 바쓰(감사합니다)”를 연발했고, 헤어질 땐 반드시 미소에 덧붙여 “빠까, 더자프뜨라(다음에 또 봐요)”라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런데 철썩같이 믿었던 그가 지금 헤매고 있는 듯하다. 답사단원들은 하나 둘 그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 친구, 정말 헛똑똑이 아녀?’, 대략 그런 불신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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