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모든 치유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나의 치유는/너다/달이 구름을 빠져나가듯/나는 네게 아무것도 아니지만/너는 내게 그 모든 것이다/모든 치유는 온전히/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아무것도 아니기에 나는/그 모두였고/내가 꿈꾸지 못한 너는 나의/하나뿐인 치유다. (김재진 시 ‘치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스토리에 빠져 미래를 위해 살거나 과거를 재탕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있다. 과거는 돌아갈 수 없고, 미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이 순간 속에서만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놓치는 것이다. 매 순간을 있는 그대로 경험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근본적인 받아들임’을 할 수 있다면, 무가치감의 트랜스에서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그 진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받아들임’(저자/타라 브랙, 역자/김선주·김성호) 옮긴이의 말 중에서)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 자신을 찾는 길이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는 길이다. 비록 그 순간이 고통스러운 상황일지라도 깨어 있는 의식으로 알아차리면 그것은 곧 자신과 관계된 모든 이의 치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현실의 고통을 지혜롭게 떠안는 이야기는 우리 평범한 삶의 현장 도처에 보석처럼 숨어 있다. 다음의 이야기는 필자가 잘 아는 000교수의 이야기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모범적으로 받아들여 감동을 주는 이야기이기에 소개한다.

정년을 몇 해 남긴 그는 집에 들어가는 일이 버거워졌다. 아내는 실어증에 걸려 누워만 있었다. 아내의 실어증은 삼남매 시집장가 보내고 나서 더욱 나빠졌다. 대화할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가 집에 들어왔을 때 현관에 신발이 여러 켤레 놓여 있었고, 방에서는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두 며느리와 딸이 방 가운데서 다투었다.

두 아들과 사위는 각각 말없이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서로 어머니를 모시라 하고 딸은 아들이 있는데 왜 내가 모시느냐며 언성을 높인다. 그는 문을 살짝 닫고 아내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아내는 고개를 돌린다. 그는 아내의 팔을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여보 미안해.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어. 이제 당신 곁에서 한 시도 떠나지 않을 거야.”

그러자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다음 날 바로 학교에 사표를 제출한다. 그 후 아내를 위한 식단을 짜고. 끊임없이 아내와 대화를 하고, 쉬지 않고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다.

우리나라 여느 가정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교수의 태도는 여느 가정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태도가 아니다. 만약 그가 자식들이 싸우는 현실만을 보았다면, 우리나라 여느 가정에나 볼 수 있는 꼴사나운 장면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그는 있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내의 병은 깊고, 아들, 딸, 며느리 어느 누구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는 아내를 돌보는 일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임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연구업적 쌓는 일이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보다 아내를 돌보는 일이 더 가치 있는 일임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이 아내를 전적으로 돌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대로 실천한다.

아내를 헌신적으로 돌보기로 마음먹은 그의 선택은 성스러운 선택이었다. 그가 모든 걸 물리치고 아내를 돌보는 선택을 하였기에 그의 가정에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자식들을 불효자로 만들지 않고, 아내를 치유시킨 최선의 방법이었다. 자식들의 고통을 덜고 아내를 치유시키고 결국 자신도 치유를 받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타인에게 전가시키지 않고 자신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실을 거부하거나 물리치지 아니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상을 외면하지 않고 본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청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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