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304명이 희생된 세월호 참사의 일차적인 진실 규명작업으로 여겨진 승무원 15명에 대한 1심 재판이 끝났다.

    광주지법 형사 11부(임정엽 부장판사)는 11일 이준석 선장에 대해 살인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징역 36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선내에서 추락한 동료 승무원을 구하지 않은 기관장에게는 살인죄를 인정해 징역 30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13명에게는 징역 5~20년을 선고했다.

    유가족의 강한 반발을 산 살인 유무죄 판단과 형량에 대해서는 항소심의 판단을 다시 받을 것으로 보이지만 선장에서 기관사까지 승무원 전원의 역할과 원인 제공 정도에 따른 단죄의 첫 작업은 마무리된 셈이다.

    그러나 이번 재판은 책임자 처벌 이상의 의미가 있다.

    ◇ 일주일 2~3회, 30회 공판…피해자 배려한 절차진행 주목
    비정한 승무원들을 심판하는 이번 재판은 원인 규명, 책임자 처벌 등 본질에 더해 사법사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선장 등이 구속될 당시 재판 관할 법원은 광주지법 목포지원이었지만 목포지원의 규모 등을 고려해 대안으로 광주지법 본원이 재판을 맡게 됐다.

    광주지법은 201호 법정의 피고인, 변호인, 검찰 좌석을 늘리는 공사까지 했다.

    광주지법 형사 11부(임정엽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6월 10일, 17일, 24일 세 차례 공판준비 절차에서 1등 기관사를 뺀 14명은 혐의를 부인했다.

    6월 24일 오후 시작된 첫 번째 공판에서 세월호의 '쌍둥이 배'라 불리는 오하마나호에 대한 검찰 검증 영상을 시청한 재판부는 30일에는 인천 국제여객터미널을 찾아 직접 오하마나호를 살펴봤다.

    7월 22일 4회 공판에서는 증인 신문이 시작됐고 28~29일에는 공판 외 절차로 재판부가 안산지원을 찾아가 단원고 학생 22명과 일반인 증인 2명의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이후 재판은 매주 2~3회씩 진행됐다. 법정에 출석한 증인만 75명에 이른다.

    8월 19일부터는 안산에 사는 다수 피해자 가족들을 위해 광주지법의 재판실황이 수원지법 안산지원에 중계됐다.

    대법원의 '법정 방청 및 촬영 등에 관한 규칙' 개정으로 사법 사상 처음 이뤄진 원격 중계였다.

    9월 2일부터는 형사 재판의 마지막 심리 절차인 피고인 신문에 들어갔다.

    세월호 침몰 과정을 모의실험으로 분석한 전문가들의 증언도 이어졌다.

    지난 10월 21일 28회 공판에서는 희생자 가족 등 16명이 피해 진술을 했다. 아이들의 생존 당시 모습이 담긴 동영상에 법정은 통곡과 오열로 뒤덮였다.

    재판부는 그동안 공판준비 기일(절차) 3회, 안산지원에서 이뤄진 공판 외 준비 기일 2회, 공판 30회를 진행했다.

    증거기록만 동영상을 빼고도 3천200여건에 2만쪽, 조서 등 공판 기록은 1만쪽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 "역사에 남을 재판", "궁금한 게 아직 많은데…"
    재판장은 공판을 시작할 때, 마무리할 때마다 유가족들에게 할 말이 있는지 물었다.

    피고인이나 증인 신문이 끝날 때도 묻고 싶은 게 있는지 물었다.

    재판부는 승무원들의 공소사실과 다소 거리가 있는 내용이더라도 유가족의 의사를 존중해 질문을 대신 했다.

    재판장은 '실체적 진실 규명'이라는 재판의 목적을 법정에서 누차 강조했다.

    후대에 평가받게 될 재판의 역사성을 고려해 전문가들의 원인 분석 보고서 등 증거 관리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공판 조서의 오타를 즉각 수정하는 꼼꼼함도 보였다.

    유가족들은 다른 선박이나 암초 등과의 충돌, 국정원 개입설 등 사고 직후부터 줄곧 제기된 의혹과 관련해 묻기도 했다.

    충돌설 등을 뒷받침할 정황은 나오지 않았다. "의혹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는 승무원들의 진술에 따르면, 또 검찰 수사결과에 따르면, 승무원 중에는 국정원 직원도 없었고 국정원에 사고내용을 보고하지도 않았다.

    소모적인 논쟁을 불식한 성과를 거뒀지만, 재판상의 한계도 있었다.

    강도 높은 수사와 계속된 재판에도 승객 구조의 황금 시간(골든 타임)이자, 사고 직후부터 구조 때까지 짧지만은 않았던 1시간가량 승무원들의 행적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유조선 둘라에이스호 선장, 해상교통관제센터(VTS) 등에서 승객들을 퇴선시키라는 요청이 있었는데도 묵살하면서 승객은 외면한 채 자신들만 구체적 탈출 논의를 하지 않았는지 유가족은 의심했다.

    유가족은 줄곧 '양심선언'을 요구했지만, 법정에 선 승무원들은 "경황이 없었다"고만 답했다.
    사고 순간 자신의 선실에서 휴대전화를 만지고 있다가 속옷 차림으로 조타실로 간 선장이 당시 뭘 했는지도 풀리지 않은 의문점이다.

    구조 과정에서 허술하기 짝이 없는 '민낯'을 드러낸 구조당국의 과실은 다른 재판에서 다뤄질 예정이거나 아예 기소가 이뤄지지 않아 다룰 수 없었다.

    기관장, 1등 기관사, 3등 기관사는 해경이 오는 동안 캔맥주를 마신 정황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수사 당시 이미 밝혀진 내용이었다.

    일각에서는 공소 사실 외에 새롭게 드러난 내용이 별로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공소 사실을 토대로 할 수밖에 없는 재판의 구조적인 한계라는 자조 섞인 반응도 나왔다.

    7개월 가까운 수사와 재판에서도 채우지 못한 부분을 메우는 일은 항소심 재판부, 진통 끝에 통과한 세월호 특별법에 따라 활동하게 된 특별조사위원회와 특별검사의 몫으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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