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수애 충북대 교수

쌀쌀한 날씨 탓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든다. 옷깃을 여미며 주변을 둘러보니 단풍진 잎사귀들이 참 아름답다. 이른 아침이지만 도로는 벌써 깨끗하게 쓸려있고 곳곳에 수북이 쌓인 낙엽더미가 늦가을의 운치를 더해준다. 바스락거리며 구르는 마른 잎을 밟으며 시 구절을 읊고 낙엽 타는 냄새를 맡으며 행복해 하던 소녀시절의 낭만을 떠올린다. 여유 없는 생활의 연속에서 잠시나마 쉬어가는 시간을 가져본다.

이번 학기부터 양성평등상담소 일을 맡고나서 사무실이 위치해 있는 도서관 건물을 자주 출입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활력이 된다. 짧은 거리지만 캠퍼스 내를 걸어 다니며 운동도 할 수 있고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면서 삼삼오오 해맑은 모습으로 스쳐 지나가는 학생들을 만나는 기쁨도 얻을 수 있다.

남녀의 인구가 절반인 사회에서 어느 한 쪽 성에 치우친 부분이 많아 성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 말부터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과 여성발전기본법, 성폭력방지법 등을 제정하여 양성평등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양성평등지수는 세계적으로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정과 사회에서의 역할 기능, 특히 고용 측면에서 아직도 남성보다 여성에 대한 처우가 매우 낮은 것이 현실이다. 최근 증가하고 있는 성범죄 피해자가 거의 여성임은 말할 것도 없다.

90년대 초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희롱 문제가 불거진 곳이 대학이었다. 사회 전반에서 보다 심각한 성범죄는 많지 않으나, 대학 내에서 성희롱, 성폭력을 그리 놀라운 사건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대학 구성원들이 특정한 관계 속에서 생활하고 평등한 성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SNS나 통신장비의 사용에 익숙한 학생들 간에 원하지 않는 언어폭력이나 사진촬영 등의 사건이 발생할 여지도 많다. 그래서 여러 대학에서 성희롱을 포함하여 성폭력 피해의 신고접수와 상담, 성폭력 예방을 위한 홍보와 교육을 담당하는 부속기관을 설치하여, 전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예방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건전한 성의식을 함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남성이 다수이던 학과에 여학생이 늘어나고 여성이 다수이던 학과의 남학생 수도 꾸준히 증가하였다.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더 많이 부담하던 관행을 깨고 커플통장을 만들어 데이트 비용을 공동으로 조달할 만큼 형식적으로는 양성평등 문화가 발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장 평등할 것으로 생각되는 대학생 집단에서도 양성평등 토론에 참여한 남학생의 편견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남존여비와 남아선호사상은 많이 사라진듯해도 아직 사회 곳곳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선택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정과 학교에서 더 많은 관심과 교육이 필요하다.

엊그제도 저명 수학자인 S대 교수가 인턴 여학생을 성추행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국제학술대회를 주관할 만큼 학문적 성과를 높이 쌓아온 분이 자신의 감정을 이성적으로 잘 통제하지 못하여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청주에서도 한 중학교 교사가 여학생을 성추행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제자를 가르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스승으로서 차마 해서는 안 될 행동으로 어린 학생에게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을 어찌 교육자라 할 수 있을까? 적어도 가장 안전해야 할 학교에서 이런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 한 순간의 실수라도 엄하게 다스려 부모가 안심하고 자녀를 학교에 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 정치적으로 이름을 알렸던 분들이 성범죄 사건에 연루되어 뻔히 아는 거짓말로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고 변명으로 일관하는 비굴함을 보면 사회적 지도자에 대한 인격적 검증이 더욱 철저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성범죄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2008년 전자발찌를 부착하는 전자감독제도가 도입된 후에도 전자발찌 대상자의 재범 건수가 증가하여 국민 불안도 가중되고 있다.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가장 기본적인 인성을 가르치는 교육이 더욱 필요하다. 성적과 성과에 치중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쇄신하는 것도 급선무이다. 평소 생활권 내에 성범죄가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어, 건강하고 아름다운 성문화가 정착되고 여성이 안전하고 양성이 행복하게 동행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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