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논설위원, 시인)

 

고즈넉한 산골마을 초겨울 햇살이 따사롭다. 돌 너와집 처마에 주렁주렁 곶감이 익어간다.

늦가을엔 꽃보다 잎이, 잎보단 열매에 더 애착이 간다.

만뢰 산 자연생태공원과 인접한 ‘보련(寶蓮)마을’에서 만나는 풍경이다. 50여 호 옹기종기  야산 기슭에 둥지를 틀고 새알처럼 들어앉은 마을이다. 언뜻 보기에도 도시에선 느낄 수 없는 안온함이 있다. 4년 전 서울에서 낙향하여 이곳에 자릴 잡았다는 60대 후반의 젊은(?)이장의 마을자랑에 삶의 여유가 넘친다. 집 구경을 시켜주며 사랑채 전통 아궁이 제작기법도 선심 쓰듯 들려준다. 한 번 불을 때서 방을 덥혀놓으면 열흘은 끄떡없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그 위에 황토를 바르고, 숯을 깔고,... 소주병 빈 병을 800개쯤 옆으로 뉘어 놓고 그 위에....열기를 한 번 더 잡아주는 방식이지요.....굴뚝은 일 미터 오십은 돼야하고요...”

이런 저런 마을 공동체사업을 소개하는 이장의 목소리에 보람과 자긍심이 한껏 실려 있다.

 

문화탐사는 결국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문화탐사는 세월이 들려주는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일이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보탑사 ‘백비(白碑)’에서 역사의 행간을 읽어내지 못하면 백비는 그저 오래된 돌덩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마을 뒤로 난 가파른 샛길을 얼마쯤 오르면 ‘도솔암’ 돌탑 위에서 중생을 기다리는 부처님을 만난다. 가쁜 숨을 내려놓으면 시를 쓰는 스님이 차(茶)를 내주며 우려낸 차(茶)만큼이나

그윽한 덕담을 건넨다. “수행을 꼭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른 사람의 언행을 보고 저건 아니다 싶은 것을 따라하지 않으면 그게 수행이지요.”

시화(詩畵)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 스님의 삶에서 인생은 ‘고해(苦海)’이기보다는 따뜻한 인연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것임을 감지할 수 있다.

 

‘문화복지’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복지다. 서로에게 ‘즐거운 인생’을 선사하는 상생의 복지며 창조적 복지다. ‘선거=복지’라는 놀음판에서 벗어나야 보이는 참된 복지가 ‘문화복지’다. ‘문화복지’ 만큼은 ‘무차별 공짜복지’라는 오명을 씌우지 말아야 한다. ‘삶의 질‘을 높이는 ’문화복지‘의 정책결정 우선순위가 경제적 효용을 따지는 것으로 시작돼서도 안 된다.  문화복지가 잘 이뤄진 나라가 잘사는 나라고, 잘사는 나라에서 사는 국민이 행복한 국민이다. “문화복지‘야말로 ’보편적 복지‘를 지향해야 하는 이유다.

 

흔히 지금 ‘베이비부머(baby boomer)’ 세대를 준비 안 된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1세대로 본다. 생체나이(New Biological Age)가 몇 십 년을 뒷걸음질 쳐서 80세는 돼야 노년 축에 들고 60 환갑은 이제 중후한 장년(壯年)으로 변했다. 품위를 지키고 여유로워야 할 은퇴 후의 삶이 불안과 공포로 이어져서는 안 될 일이다.

은퇴 후 생활이 ‘아름다운 노년’이 아닌 지루한 100세를 기다리는 ‘무기력한 생존’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문화복지의 지향점은 ‘삶의 질’ 향상이고, ‘행복한 삶’이 궁극적 목표다.

 


무엇보다 문화복지는 자기 삶의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그 자신에 맞는 도전과 열정이 지속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 주는 것이 정부, 곧 복지정책 담당자들이 유념해야 할 일이다. 자생력 없는 문화복지는 그야말로 시멘트 바닥위에 조성된 갯벌과 같다. 2013년 12월 ‘문화기본법’이 제정된 이래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시행되었지만 아직은 문화복지의 개념이 ‘수생식물’처럼 겉도는 실정이다.

‘2060년에 4대 공적연금 모두 바닥’이라는 보고서를 보고 우울해 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는 병이 도진 것뿐이다.  일자리에만 초점을 맞춘 복지정책도, 예산으로만 해결하려는 복지도 시대착오적이다. 진천나들이에서 만난 다양한 삶의 모습이 바람직한 ‘문화복지’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이제는 보다 근본적인 ‘문화복지’를 챙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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