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군굿뜨래경영사업소장 조희철

 

어느 날 출근길에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한 여자 아이가 있었다.

차림새로 보아 유아원 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눈동자가 얼마나 맑고 예쁜지 그야말로 때 묻지 않은 천사의 눈을 가진 아이였다.  아무리 어린 아이의 시선이었지만 나는 자신도 모르게 옷매무새를 살펴보았다.

기분 좋은 아침을 만들어 준 아이에게 고마움의 뜻으로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고 그 아이 곁으로 다가가는 순간, “ㅇㅇ아!”하고 건너편에서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하면서 달려간 아이의 손을 잡는 여인을 보는 순간 하마터면 “아니, 이럴 수가!”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 여인은 평소 오가며 자주 보았던 사람으로 그토록 예쁜 아이의 엄마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전부터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젊은 부부가 가끔 눈에 들어오곤 했다.  지적 장애를 가진 부인과 놀이터 벤치에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볼 때 마다 ‘저들은 무슨 사연을 안고 결혼 했을까?’하는 의구심을 가지곤 했다.

부인은 심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첫눈에 봐도 정상인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을 정도의 지적 장애인이다. 몸집은 배나온 남성만큼이나 뚱뚱한데다 여성미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반대로 남편은 얼굴도 괜찮은 편에다 모든 게 정상이다. 가끔 환경미화원들이 입는 조끼를 착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청소용역업체에 근무하고 있는 모양이다. 

멀쩡한 사람이 왜 지적 장애인과 결혼해 사는 걸까? 나는 그들을 볼 때 마다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부모들의 약속?  아니면 여자의 친정이 엄청난 갑부였나?  

별의별 생각에 공연한 골머리를 썩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아침, 천사를 만난 날부터 나의 이런 생각은 모두 사라졌다.  한 때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몹시 미안해서 찾아가 사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째서 사랑은 같은 부류들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을까.  한 쪽의 모자람을 한 쪽의 충만함으로 채워줄 수 있음을, 부모의 미모나 장애, 지식 등은 천사가 태어날 수 있는 조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왜 나는 알지 못했을까?

소위 사무직이랍시고 현장 노동을 하는 그들에게 우월감을 느꼈던 건 아닐까? 따지고 보면 그들보다 나을게 하나도 없는데도  이 모든 것이 분명 내 마음속에 은연중 자리 잡고 있었던 그릇된 편견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

폴 존슨이란 사람은 그의 저서 ‘지식인의 두 얼굴’을 통해, 루소, 셸리, 마르크스 등 여러 지식인의 위대한 철학과 기념비적인 성과 뒤에 감춰진 위선과 허위를 파헤치면서 지식인들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에 경종을 울렸다.

이렇듯 사람들은 누구나 편견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편견을 벗어 던지는 순간 주변의 모든 것들이 더욱 다정한 모습으로 내 가까이에 다가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편견의 장막은 너무나 견고한 것 같다.  동지 아니면 적이 되어버리는 편견들. 그것을 해소하는데 앞장서야할 정치인이나 언론 등이 오히려 편 가르기에 나서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따금씩 마주치는 그 가족을 볼 때면 이제는 행복하고 아름답게 보여 매우 흐뭇한 기분이 든다. 출근길에 만난 한 어린 천사가 편견을 버리면 곧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삶의 지혜를 내게 가르쳐준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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