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본에 이어 소련서도 최초의 연극 순회공연

▲ 쁘찔로프카 중학교 도서관장인 파브베르도바 발렌찌나 보리소브나씨가 학교 내에 마련된 조명희 전시설에서 답사단에게 1930년대 당시 륙성촌에서 거주했던 고려인들의 삶과 륙성농민청년학교, 조명희 선생 등과 관련된 설명을 하고 있다.

(동양일보 김명기 기자) 학생들이 수업을 끝내고 하교한 뒤여서 쁘찔로프카 중학교는 한적했다.

낯선 이방인들의 방문에 의아한듯한 표정의 여교사가 한 명 나왔다. 방문단은 학교를 찾은 목적에 대해 설명했다. 조명희 선생의 삶의 궤적을 좇아 여기까지 오게 됐노라는 말을 덧붙였다. 여교사는 한국에서 온 방문단에 대해 반가운 인사를 건네면서도 약간은 낭패한 기색이었다. 학교 일정이 모두 끝나 조명희 전시실 관람이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답사단은 한국에서 이곳까지 오게 된 거리와 정성을 셈해보라 했다. 조명희 선생의 삶에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우리에겐 매우 소중한 것인데, 포석이 교사생활을 한 곳에서, 그 지역주민들이 선생의 전시실을 꾸며놓았다면 그것이 우리에겐 얼마나 큰 의미가 있겠느냐는 감성논리를 폈다.

김 안드레이 교수가 지레 “유럽이나 러시아 학교는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방문조차 쉽지 않다”고 하자 조철호 단장이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어딨어! 우리가 여기까지 왜 왔는데… 무조건 추진해”라며 일침을 놓았다.

 

다소 높아진 언성에 방문단 분위기가 머쓱해지자 조 단장은 멋적게 웃으며 자신이 겪은 일화를 소개해 주었다.

“십 수년 전 한국의 여러 문인들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푸시킨 박물관을 찾았을 때예요. 이런저런 빠듯한 일정에 쫓기다보니 폐관 시간 5분을 넘기고서야 박물관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당연히 박물관 직원들은 폐관 시간이 넘었으니 안된다고 했죠. 우리 일행은 그랬어요.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 서울서 이곳까지 거리가 얼마냐, 그 먼 거리를 러시아가 자랑하는 푸시킨을 보기 위해 한국의 글쟁이들이 왔는데 그냥 발길을 돌리게 된다면 너무 안타까운 일 아니겠느냐. 그 말을 들은 직원들이 자기들끼리 회의를 열어야 겠다며 안으로 들어가요. 그런데 5분, 10분이 지나도 이 사람들이 안 나오는 게야. 한 20분 쯤 됐나, 그때서야 환한 미소를 띠면서 들어오라고 하는데, 박물관에 들어가 보니 아이고, 감동도 그런 감동이 없어요. 우리 문인들 몇 명 맞이하기 위해 손님맞이 세팅을 전부 새로 한 거예요. 아름다운 음악도 틀어놓고, 직원들은 손님을 맞기 위해 도열해 있고. 그러니까 그 양반들이 회의를 한 건 박물관을 열어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온 저 손님들을 어떻게 아름답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였던 거예요.”

 

▲ 쁘찔로프카 중학교 전경. 이 학교는 륙성농민청년학교의 후신이다.

시간도 늦고, 배도 고프고, 이제쯤 숙소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이었을 김 교수의 ‘설렁설렁’한 마음에 조 단장의 일화까지 곁들인 말에 김 교수는 다시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곤혹스런 표정을 짓던 그 교사는 잠깐 기다려보라며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10여분 쯤 지난 뒤 쉰쯤 돼보이는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이 학교의 교장이었다.

김 교수는 지금까지 여교사에게 했던 말들을 되짚어 그 여교장에게 다시 설명했다. 설명을 모두 듣게된 교장 또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이 학교 교장인 것은 맞지만 전시실 열쇠가 없다는 것이었다. 전시실을 전담해서 관리하는 교사가 한 명 있는데 이미 퇴근 후라는 것이었다. 쁘찔로프카 중학교 재학생들은 인근에 있는 여러 마을의 아이들인데 교사들도 그 마을들에 산재해 살고 있다는 것, 특히 전시실을 관리하는 교사는 꽤 멀리 떨어진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 그래서 자신이 교장임에도 퇴근 후의 교사에게 한국 방문단이 왔으니 학교로 곧장 오라고 오더를 내릴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한참을 뜸들이더니 큰 기대를 하지 말라며 교장은 전화를 걸었다. 몇마디 주고 받더니 관리 교사가 20분쯤 뒤에 온다는 승락을 했다는 것이다. 방문단은 그말을 듣자마자 환호성을 질렀다. 조 단장이 가슴으로 느꼈던 샹트페테르브르크 푸시킨 박물관의 감동이 이 작은 오지 마을 륙성촌에서 재연된 셈이었다.

 

20분 쯤 지나자 관리교사가 나타났다. 문학을 가르친다는 파브베르도바 발렌찌나 보리소브나 여교사였다. 나이는 56세.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나 살아왔는데 륙성촌으로 와서 거주한 지는 36년이 됐고, 쁘찔로프카 중학교에서 24년간 교사 생활을 하고 있고, 현재 도서관장을 맡고 있다고 했다. 전화를 받고 조명희 선생을 찾아온 한국 손님이라는 말에 한달음에 달려왔노라 했다.

 

“조명희 선생님은 륙성촌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가장 존경받는 분이에요. 고려인 작가와 교사들을 많이 배출하셨고, 고려인들의 정신적인 지도자이셨지요. 선생님의 고향이 한국에 있는 진천이라는 것도 알고 있답니다. 저는 조명희 선생님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있었고, 그 분에 대한 연구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저는 포석 선생님의 따님인 조선아씨를, 그 분이 살아계실 때 많이 만나기도 했어요. 제가 륙성촌으로 와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살게 된 것도 조명희 선생님에 대한 존경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김 교수가 웃으며 보리소브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제가 바로 조선아씨의 아들 김 안드레이입니다. 조명희 선생님의 외손자이고요.”

보리소브나는 너무나 놀라 할 말을 잊었다. 5초 쯤 정적, 그녀는 김 교수를 와락 껴안았다.

“영광입니다. 저에겐 너무 큰 영광입니다. 조명희 선생님의 외손자를 직접 만나게 되다니… 조선아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참 상심이 컸었는데요.”

조철호 단장과 김왕규씨 부부까지 포석 유족들을 소개하자 그녀는 감격해서 울 지경이었다.

▲ 조명희 전시실 탐방을 마치고 쁘찔로프카 중학교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답사단.

 

조명희 전시실은 쁘찔로프카 중학교 1층에 마련돼 있었다. 답사단은 보리소브나 관장의 안내로 조명희 전시실로 들어갔다.

전시실은 작은 편이었다. 열 댓평 정도 될까한데, 조명희 선생과 고려인들의 삶에 대한 소개 패널들이 걸려있고, 당시 륙성촌 거주민들이 사용했던 생필품들을 발굴해 유리 부스에 전시해 놓고 있었다.

보리소브나 관장이 륙성촌 거주 고려인들의 삶과 포석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1937년 이전까지 륙성촌은 어찌보면 고려인의 수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37년 소련의 강제 이주정책 이후 륙성촌은 폐쇄됐고, 고려인들의 삶의 흔적은 철저히 제거됐습니다. 여기에 있는 유물들은 1942년 이후 새로운 정착민들이 들어오면서 발굴했던 것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일제 저항작가였던 조명희 선생은 이 곳에 터를 잡고 고려인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고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키워주셨지요. 선생의 그런 열정으로 제자들 또한 독립운동에 가담하거나 사회적으로 큰 역할을 한 분들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덧붙여 설명하는 그녀의 말에서 답사단은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됐다. 그것은 포석의 ‘화려한 경력’에 방점을 하나 더 찍는 중요한 것이었다.

“조명희 선생은 륙성농민청년학교 교사 시절 학생들을 모아 연극동아리를 조직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담배공장 강당이 꽤 컸던 모양인데, 그곳에서도 공연을 했다지요. 매우 수준 높은 연극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는데, 그 내용이 우스리스크 신문에 보도될 정도였다고요. 상설 아동극장을 만들어 정기적인 공연을 하고, 또 연해주 지역을 돌면서 순회공연도 벌였다고 합니다.”

최 예까떼리나도 포석의 공연과 관련된 언급을 하고 있다.

최씨는 “륙성농민청년학교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있었던 포석은 시, 소설, 평론, 번역 등 문학은 물론이고 자신이 직접 쓴 희곡으로 학생들로 하여금 순회 연극공연을 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씨는 1988년 11월 24일자 레닌기치에 기고한 글을 통해 “포석이 륙성촌에서 3년 동안 교사생활을 하는 기간에 김호준 선생과 같이 음악동화극을 쓰기도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녀는 또 “그들(포석과 김호준)은 원동에 아동문학이 없는 것을 생각하여 첫 동화극을 만들었다”며 “그러나 조명희는 자신의 이름은 감추고 김호준의 이름으로 ‘봄나라’를 만들었”고 “‘봄나라’를 가지고 아동들을 위한 동화극을 완성해 나갈 즈음 육성촌의 제일 미인이라 불리던 최 아가피야와 채정숙은 학생들을 데리고 동화극을 연습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 조명희 전시실에 게재된 조명희 선생 관련 패널.

도서관장의 이런 진술과 최 예까떼리나의 기술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포석의 이런 행보가 한국 희곡사의 외연을 넓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포석은 1921년 7월 한국 문학 최초의 희곡 ‘김영일의 사(死)’를 발표한 뒤 조선으로 건너와 ‘동우회’ 순회 연극단을 조직해 최초로 전국 순회공연을 가져 호평을 받는다. 여기까지가 국문학사에 기록돼 있는 포석의 업적이다. 이제는 여기에 하나의 사실을 더 추가해야 한다. 포석이 소련으로 망명한 뒤 연해주 지역을 순회하며 최초의 순회공연을 벌이며 연극의 외연을 넓혀간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포석은 최초의 희곡을 쓰고, 최초로 일본, 조선, 소련에서 순회공연을 벌인 연극 기획자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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