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살다간 이름 기리려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 쁘찔로프카 중학교 조명희 전시실에 게재돼 있는 유명 고려인들. 왼쪽 상단 첫번째로 소개되고 있는 이가 포석 조명희 선생이다.
▲ 폐허가 된 륙성농민청년학교 내부 모습.

(동양일보 김명기 기자) 러시아 극동지역 오지에 있는 작은 마을 륙성촌. 지도상으로 이름조차 없을 듯한 이 작은 마을 주민들과 학교는 80여년 전 이 마을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포석에 대해 존경과 감사를 표하며 포석을 자신들의 긍지로 여기고 있었다.
한국 근현대문학의 개척자이자 선구자인 포석이 한국에서 국문학사적인 업적을 인정받고, 후학들로부터 ‘전형(典型)’을 보여준 그의 작품에 대한 찬사를 얻고, 후손들로부터 일제에 강렬하게 저항했던 그의 민족주의적 삶에 대해 존경을 받는다는 건 지극히 당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현실에서 포석은 아직까지 ‘먼 그대’로 남아 있다. 넘기 힘든 견고한 벽, 그 경색된 이데올르기적 카타고리 속에 갇혀 제대로 된 평가조차 유보돼버린 현실은 착잡한 일이 아닐수 없다.
이와 비견해 러시아 궁벽한 마을 쁘찔로프카(륙성촌)의 주민들이 100년 가까운 세월 저편의 포석을 기리고, 추모하고, 그의 뜻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미있는 모습들은 그들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만큼 자책의 부끄러움과 가슴 한 켠 짓누르는 먹먹함을 가져다 주었다.

우연히 전시실 한켠에 마련돼 있는 방명록에 눈길이 갔다. 방명록에는 많은 글들이 적혀 있었다.
답사단이 오기 전에도 많은 한국인들이 조명희 선생을 찾아 이 작은 박물관까지 다녀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들이 어떤 정보와 루트를 통해 이곳까지 와서 포석 조명희 선생에 예를 표하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마치 그런 느낌이었다.
‘강호 도처에 고수(高手)가 참 많구나!’
방문객들이 빼곡이 남긴 방명록 가운데 몇 가지를 추려 적었다.

▲ 방명록에는 1990년대 중반부터 근자에 이르끼까지 륙성촌을 찾아와 포석의 뜻을 기린 이들의 사연과 이름이 빼곡이 담겨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제강점기 때 많은 핍박을 받았던 이들에 관한 책을 읽었을 때 받았던 충격, 고려인들을 생각하니 그보다 더 가슴이 아프다. 새로 맞이하는 해 첫날에 뜻깊은 곳을 와보게 돼서 정말 감사하다. / 1997년 3월 12일 박동채.
이 곳도 고려인이 사는 곳이라니 놀랍다. / 1998년 12월 22일 최은영.
이 곳을 와 보니 참 좋고 우리나라의 옛 유물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 1999년 3월 28일 하지원.
아픈 역사를 어떻게 회복할 지 마음 아프고 어깨가 무겁다. / 2012년 1월 1일 김지권.
당신이 진정 호국의 영웅이시며 애국자입니다. / 대한민국 울산 사람들.
아무리 꽃 핀 길이 곱다한들 당신이 조국을 위해 헌신한 날만 하오리까. 사랑합니다, 조명희 선생님. / 2012년 6월 21일 미혜.
무명의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며. / 2012년 6월 21일 수원대 박환.
고려인의 슬픔 ‘카레이스키 끝없는 방랑’을 쓴 작가 문영숙 다녀갑니다. / 2012년 9월 12일 문영숙
삶의 길, 역사의 행로를 따라 잠시 다녀갑니다. / 2012년 9월 12일 동화작가 안성교
이 곳에 잠드신 영령들이시여, 당신이 진정 호국의 영웅이시며 애국자입니다. / 대한민국 울산 사람들.
감명 깊게 잘 보고 갑니다. 이왕이면 한글 번역 설명이 곁들여졌더라면 더욱 좋았겠네요. 고맙습니다. / 2012년 9월 12일 김산기.
고려인 자취를 잘 보고 갑니다. 계속 이 곳을 지키며 행복하세요. 2012년 9월 12일 신혜숙.
우스리스크의 현장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의 고귀한 영혼을 생각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 임윤.
고려인 역사를 잘 보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대한민국 경기경찰청 여주경찰서 경위 유재훈.
우리 답사단도 방명록에 글을 적었다. 대표로 적은 조철호 단장의 글씨, 달필이다.
조명희(趙明熙)의 이름은 밝고 밝다는 뜻. 그리하여 불꽃으로 살다간 이름 기리려 그 흔적 찾아왔다 갑니다. / 2014년 9월 4일 포석 조명희 선생 답사단.

▲ 답사단을 대표해 조철호 단장이 방명록에 글을 썼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는 길, 륙성촌에서 출발한 시간은 오후 7시 20분.
‘이 길이 아닌 게벼, 아까 길이 맞는 게벼’ 하며 한참이나 헤맸던 그 길을 되짚어 가고 있다. 벌써 사위는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답사단은 우수리스크 못미쳐 길가에 있는 휴게소로 들어갔다. 늦은 저녁을 만두국으로 해결했는데, 우리 만두와는 많이 달랐다. 기름기가 많아 조금 느끼한 수프에 만두 몇 조각 넣은 것이었지만 먹을만은 했다. 시장기가 반찬이라고, 워낙 배고팠던 답사단은 만두국을 후딱 해치우고 밖으로 나왔다.
지평선 저 끝, 해가 진 자리에 붉은 놀이 타오르고 있었다. 시간이 꽤 늦었는데 위도상 북쪽지역이라 해가 늦게 떨어졌다.
한국에서의 저녁놀이 온화하고 포근하고 소박하며 정감어린 것이었다면, 이곳의 저녁놀은 장쾌하고 웅장하고 화려하며 강렬한 것이었다.

우수리스크 시내의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포석의 삶의 향기가 많이 배어있는 곳. 언제 다시 이곳을 찾아올 수 있을 지 기약할 수 없었기에 그 도시를 스쳐지나가는 답사단의 마음은 개운하지 못했다.
우수리스크(Ussuriysk)를 소개하는 것으로 서운한 감정 달래본다.
러시아 극동 프리모르스키 지구에 있는 도시.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중국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하얼빈(哈爾濱)행 철도의 연결지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끼고 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약 80㎞ 떨어져 있다.
1866년에 니콜스코예라는 마을로 세워졌으며, 1897년에 시가 되었다. 역사가 160년이 채 안된 신설도시라 할 수 있다. 유럽권이었던 러시아가 극동으로 눈을 돌려 개척의 역사를 열었던 것이 1800년대였기 때문에 극동 지역의 도시들은 비교적 역사가 짧은 편이었다.
1926년에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개칭되었다가 1935년 보로실로프가 되었으며, 1957년에 지금의 이름인 우수리스크로 명명되었다. 식품가공업과 신발·양말·의류 제조업을 비롯한 경공업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의과대학·농업대학·사범대학 등이 있다. 인구는 16만1800명(1994).

▲ 륙성촌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광활한 들판에 무기재가 떴다. 답사단은 아름답게 떠 있는 무지개를 보며 이번 답사가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기를 기원했다.

답사단이 블리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 30분, 참으로 긴 하루였다.
슬라반스카야 호텔로 돌아온 일행은 내일 일정에 대해 잠시 미팅을 가졌다. 주요 내용은 두 가지. 극동대 방문과 극동문서보관소 방문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프스크까지 가는 VVO KHV 항공편이 오후 6시 5분 출발이었기 때문에 오전 3시간과 오후 4시까지의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우선 첫째, 극동대를 방문해 뜯겨져 나간 조명희 문학비 동판의 소재를 확인하고 향후 관리에 신경써줄 것을 당부하기로 했다.
그러나 극동문서보관소를 방문하려던 두번째 계획은 취소됐다. 두번째 계획은 포석과 관련된 자료들을 열람해 정확한 정보를 얻으려 했던 것이었다. 이를테면 포석이 대학교수로 있던 학교의 정확한 명칭과 근거자료, 포석이 1938년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형을 당했을 때의 자료와 1956년 극동군 관구 군법회의에서 ‘1938.4.15 결정’을 파기하고 무혐의 처리 후 복권시킨 자료 등을 복사해 내년에 건립되는 조명희 문학관에 전시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의 김일환 영사와 문서보관소 방문을 협의한 결과 그 계획은 난관에 빠지게 됐다. 김 영사의 말에 따르면 문서보관소를 방문하려면 방문 한 달 전에 영어로 공문을 보내 문서보관소 측으로부터 승락 답신을 얻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답사단이 그곳을 방문한다 해도 원하는 자료를 찾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해보는데까지는 해봐야 하지 않겠나, 그런 심정이었는데 그 마저도 수포가 됐다.
다음 기회가 주어진다면 미리 철저한 준비를 한 뒤에 일을 진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팅을 마치자 밤 12시가 가까워졌다. 답사단은 내일 일정을 위해 각자의 호실로 들어갔다.
잠자리에 들기 전 김 안드레이 교수에게 혹여나 하는 마음으로 비행기 티켓에 대해 재차 삼차 확인 당부를 했다.
“김 교수, 내일 비행기 출발 시각, 꼭, 반드시 확인해 줘!”
“걱정 마, 확인할테니.”
김 교수의 대답이 설렁설렁하게 들렸다. 그래서 또 다시 각인시켰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꼭 다시 확인해야 해!”
어떤 ‘불길한 예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답사단이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할 때부터 그런 것이 있었다. 여행사로부터 일정표를 받아 스케줄을 작성한 소책자엔 분명히 ICN VVO 러시아 항공편으로 적어 놓았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항공기가 아시아나로 바뀌었다. 출국 며칠전 항공편이 변경됐다는 것이었다. 그런 예가 또 생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에 찜찜한 마음이었지만 고된 일정 탓에 단원들은 하나 둘 골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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