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는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다. 타인의 마음을 여는 열쇠이며,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소통의 힘이다. 타인과 내가 함께 즐겁고, 함께 행복한 공존의 마음이다. 남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느끼는 공감이다.
비행기 안에서였다. 창가에 내가 앉았고 아내가 옆에 앉았다. 아내 옆에는 가운데 통로 쪽으로 노부부가 앉았다. 기내식으로 비빔밥이 나왔다. 할아버지가 고추장이 담긴 튜브를 짠다. 할머니가 “짜아”하고 큰 소리를 지른다. 할아버지는 그래도 고추장을 짜 낸다. 할머니가 더 큰 소리로 “짜짜”하고 감정 섞인 소릴 지른다. 한쪽 청력이 약한 내 귀에도 쩌렁쩌렁 울려온다. 승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노부부에게로 쏠린다. 물을 끼얹은 듯 기내에 적막이 흐른다. 스튜어디스가 황급히 달려온다. 할아버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손을 떨고 있다.
고추장이 짜다는 건지 튜브를 잘 짜라는 건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어설픈 행동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작은 일에도 과도하게 화를 내는 걸 보니, 할머니의 내면에는 화만 가득 쌓인 것처럼 보인다. 할머니 얼굴에는 불만스런 표정이 가득했다. 할아버지는 몹시 불안해 보이고 자신 없어 보였다. 사소한 일조차도 할머니에게 의존해야 하니 얼마나 답답하고 자존심이 상할까. 할아버지가 측은하기까지 하다. 측은한 건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자기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시시콜콜 남편을 돌보자니 얼마나 귀찮고 힘이 빠지겠는가? 아마 이번 여행이 끝나고 황혼이혼을 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할아버지의 손은 거칠었고 할머니는 목걸이나 귀걸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노부부는 젊어서 열심히 일을 하여 꽤 많은 저축을 한 듯하다. 물질적인 저축은 많이 하였지만 정신적인 저축은 부족한 듯이 보인다. 그 노부부를 보면서 사랑 없이 부부가 여행을 가지 말라는 영국 속담이 생각났다. 평소 배려를 익힌 할머니라면 말소리의 크기부터 작았을 것이다. 남편의 불편한 행동거지를 짜증나는 큰 소리로 탓하기 전에 자신들 외의 타인에 대한 예의를 지켰을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가 부부 사이이다. 부모자식 간의 촌수가 1촌이고, 부부간의 촌수는 0촌이다. 가깝다고 해서 조심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말하고 행동하다 보면 상처를 더 받기 쉬운 게 가까운 부부 사이이다. 결혼은 성공하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행복한 부부생활을 위해서는 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덕목들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나는 배려라고 생각한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배려는 상대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느끼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인디언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멀리 가려 하면 함께 가라. 부부란 멀리 가기 위한 동반자이다. 멀리 가기 위해 부부가 젊어서부터 배려를 저축해 놓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베푸는 게 아니라 서로 베푸는 부부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저금통장에 동그라미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또 하나의 저축통장에는 배려가 가득 찬다면 얼마나 미래가 든든할까. 이런 부부에게는 황혼녘이 와도 행복할 것이다.
<권희돈 청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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