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칸의 방에 무릎을 접고 잠 든 하얀 누에고치

오래 전 저 무릎에서는 한철 내내 누에가 자랐다

옆에서 자는 날이면 밤새 뽕잎 갉아먹는 소리가 들렸다

방을 바꾸며 마디를 키워가는 누에들

궁금한 것이 많은 어린 것들은 강물소리를 자장가삼아 잠이 들곤 했다

 

손끝은 하얀 실처럼 길어지는 듯 했지만 점점 닳아갔고

누에를 키우던 손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마디를 지탱하던 관절들이 빠져나가고

접힌 무릎 펴지 못할 때

당신의 수의를 지으신 어머니

수천 겹 흰 올을 안고 오른 섶

잠든 고치에는 이제 무릎이 없다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한 생을 헐고 나오는 것이 탈피이고 죽음이라면 죽음을 나온 그 흔적으로 돌아가는 것은 또 다른 탈피이겠지

 

혼자만의 걸음걸이로 가만가만 방을 옮겨가던

하얀 발끝에 붙은 햇살은 다 떨어져 나갔다

그러고 보니 슬픔도 예전과 같지 않다

나방이 되어 날아갈 때 모정도 끌고 날아간 것일까

 

깊은 잠에 든 지금

뜨거웠던 한 철에 남은 미온으로

유골함속 무릎은 어쩌면 부화의 계절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 당선소감 /이현정

 

오래 불러주지 못했던 또 다른 나의 호칭들...

이제 그 이름을 하나씩 호명하겠습니다.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한 이름이 있었습니다.

오래 묵은 병이 되어 늘 자리를 맴돌았고

몸속을 파고든 증상은 수 년 동안 괴롭혀 왔습니다.

이름 없는 이름으로 버려져 더 깊은 꿈속으로 들어가 버리곤 했습니다.

무성한 풀숲에 숨었다 시시때때로 몰려나와

거친 호흡으로 함께한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들려오지 않는 목소리를 기다리며 침묵으로 버텨온 시간이 고맙습니다.

돋아나지 않는 날개를 기다리며 몇 번의 겨울을 보냈는지,

그 절망의 시간을 기다리며 참아준 그들을 꼬옥 안아주렵니다.

겨울 한파의 매서운 바람을 뚫고 날아온 햇살 한 자락에

그간의 증상들이 한 겹씩 벗겨지고 있습니다.

오래 불러주지 못했던 또 다른 나의 호칭들

이제 그 작은 이름을 하나씩 호명하겠습니다.

 

이름을 불러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한 발씩 나아갈 수 있게 길 열어주신 동양일보에도 머리 숙여 감사 인사드립니다.

찬란한 봄날의 선배 문우님들, 곁에서 응원해준 가족들에게도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아직 부르지 못한 이름으로 남아 있는 세상의 시인들,

그 이름들도 함께 불러 주고 싶습니다.

 

 

○약력

1961년 경북 상주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논술글쓰기 지도사

○시 부문 심사평

사람의 숨결이 느껴지는 신선한 상상력

응모작이 예년 보다 다소 늘어났으나 신인에게서 볼 수 있는 야심찬 패기와 실험성을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었다. 마지막까지 선자의 손에 남은 작품은 윤현숙의 ‘도배하는 여자’, 이중동의 ‘몽유의 골목’,  권용각의 ‘휴지’, 이현정의 ‘누에의 잠’이었다.
윤현숙은 ‘도배하는 여자’에서, 여자는 낡은 꽃무늬에 숨어있던 벽을 불러낸다. 벽은 거친 맨살을 드러낸다. 그리고 퍼런 정맥이 툭 터질 것 같은 손등 관절을 곧 추세울 때마다 벽과 벽 사이 긴장감이 돌던 뻐근한 허리 허공에 젖혀놓은 채 둘둘 말린 하늘을 천장 가득  풀어놓고 있다 사각의 방 투명한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눈이 가는 작품이다. 
이중동의 ‘몽유의 골목’은 후미진 골목길에 비스듬히 누워 그의 각진 인상을 푸느라 햇살은 부산하고 그는 꿈속의 하늘 길을 달리다 온종일 등을 짓누르던 무계를 내려놓고 빈 몸으로  취한 휴식 달콤했을 것이라며 거친 도로를 정신없이 굴러가고 있다.  삶의 일면이 내비치는 글이다.
권용각의 ‘휴지’란 작품을 보면 휘돌 때마다 조금씩 소진되는 삶(용도)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저마다의 용도와 의미가 있는 것 회전의 끝에 남겨지는 마지막 중심은 무척아름답다고 정직하다고 응원하는 작품으로 우리네 삶이 자세를 암시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가작이다.
이현정은 ‘누에의 잠’에서 칸칸의 방에 무릎을 접고 잠이 든 하얀 누에고치를 보고 오래전 어머니 무릎에서는 한철 내내 누에고치 자랐고 뽕잎 갉아먹는 소리 그 속에서 자장가인양 잠들던 어린 시절을 불러낸다.
누에를 키우던 손을 놓고 당신의 수의를 짓던 어머니 수천 겹 흰 올을 안고 오른 섶 무릎이 없는 누에고치(유골함)로 치환, 어머니의 부화(환생)의 꿈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닌가. 내밀한 자기 문법의 언어로 표출하여 전달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사물을 볼 때 관념의 무게를 줄이는 시작을 통해 더욱 정진 대성하기를 바란다. 이현정의 ‘누에의 잠’을 당선작으로 민다.

 

심사위원 : 정연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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