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치게 그리운 아버지 향한 마음 전해졌으면”

▲ 하바로프스크 시내에서 공항 방면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 위치한 공동묘지 입구에는 ‘기억 사원’이 있다. 이 공동묘지에는 스탈린 정권 당시 억울하게 처형 당한 많은 사람들의 가묘와 표지석 등이 있는데, 사진은 포석 조명희 선생의 표지석이다. 이번 답사단이 공동묘지에 들렀을 때 이 표지석이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됐다. 답사단은 하바로프스크 한인 회장인 이장원씨에게 표지석의 행방을 알아봐 달라고 이야기 했는데, 현재까지 정확한 소재를 알지 못하고 있다.

(동양일보 김명기 기자) 김 교수가 조 단장에게 쭈뼛쭈뼛하며 말했다.

“저어… 형님, 제가 형님께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요… 하도 미리 말씀을 드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셔서…”

뜸 들이는 김 교수에게 조 단장이 재촉했다.

“뭔데 그래? 뭔 큰 죄를 지었길래? 허허 참, 다 용서할 테니 빨리 속시원히 얘기해 봐.”

“외삼촌이 오셨습니다.”

“외삼촌? 아니 그럼 블라디미르 삼촌께서 오셨다는 거야, 하바로프스크에?”

“지금 이 호텔에 계십니다.”

 

▲ 답사단을 맞이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에서 하바로프스크까지 8000여㎞ 거리를 8시간 정도 날아온 조 블라디미르(가운데)씨가 친족들과 그간 쌓인 정담을 나누고 있다. 사진 왼쪽이 조철호 단장, 오른쪽이 김 안드레이 교수.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답사단은 환호성을 질렀다.

답사단에게 참으로 반가운 분, 조 블라디미르. 포석 조명희 선생의 막내 아들이다.

그가 1937년 8월 12일 이곳 하바로프스크 ‘작가의 집’에서 태어난 지 한달여 뒤인 9월 18일, 부친 포석은 KGB요원들에게 체포돼 이듬해 총살형을 당하게 된다. 어찌보면 블라디미르에게 아버지 포석은 ‘원죄(原罪)’와 같은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숙명적으로 안고 살 수 밖에 없는 원죄처럼, 그에게는 자신의 삶의 시작과 부친의 죽음이 늘 오버랩되는 그런 비극적 가족사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숙명적으로 안고 살아야 했을 원죄였는지도 모른다.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짓밟히고 짓뭉개져버린 그 비극적이고도 처절한 가족사.

밟아도 뿌리뻗는 잔딧풀처럼, 시들어도 다시 피는 무궁화처럼 포석의 후손들은 먹먹한 그 절망을 딛고 일어서 이젠 러시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가문으로 새롭게 꽃을 피웠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모스크바를 방문해 후손들과 조우했던 이야기들로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아니, 삼촌 지금 어디 계신게야?”

“그렇잖아도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연세도 있으신데 모스크바에서 이 먼 길을 어떻게 혼자 오셨담.”

“진작 어제부터 와 계셨는데, 우리 답사단이 부담스러워할까봐 알리지 말라고 하셨어요.”

반갑기도 하고, 한편 미안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또 기쁜 이 상봉에 대한 답사단의 반응에 김 교수는 의기양양한듯 앞장 서 우리를 안내했다. 넓직한 방에 시설도 완비된 스위트룸이었다.

블라디미르는 조 단장과 김왕규씨 부부에게 다가가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블라디미르는 얼굴색이 좋은 편이었고 예술가적 풍모가 있었다.

계획으론 모스크바에서 우리 답사단을 맞이할 것이었는데, 먼 길 손님 맞이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그곳에서 하바로프스크까지 8000여㎞를 날아온 것이었다.

그나마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영접을 나온다는 것을 김 교수가 그의 나이를 생각해 만류했다고 한다.

답사단은 반가운 인사를 나눈 뒤 포석 조명희 기념관 공정에 대해 이야기 했다.

조명희 기념관은 2015년 5월께 완공 예정으로, 이 기념관을 짓는데 블라디미르가 20만달러를 기부하기도 했었다.

조 블라디미르와 인터뷰를 했다. 선생은 자신의 서툰 한국말을 부끄럽게 여겼다.

한국말이 서툴고 한국 문화에 익숙지 못한 것이 가족적 비극사의 산물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에도, 그는 김 안드레이 교수의 통역으로 이뤄진 인터뷰에 대해 내내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동양일보에 게재했던 내용을 소개한다.

 

▲ 조명희 선생의 막내 아들인 조 블라디미르. 포석의 장녀 선아씨와 장남 선인씨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현재 생존해 있는 유일한 아들이다. 블라디미르는 내년 5월께 완공 예정인 포석 조명희 기념관 건립에 사용해 달라며 20만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 조 블라디미르 인터뷰

 

지난 9월 2∼11일 9박 10일간 조명희 선생의 삶의 궤적을 찾아떠난 조명희 답사단(단장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이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만난 조 블라디미르(77)씨는 스코틀랜드식 빵모자(tam-o-shanter)에 노타이 세미정장 차림의 풍모가 썩 잘 어울렸다.

벌써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 댄디스트에 아티스트의 기품이 물씬 풍기는 조씨는 답사단이 러시아에 입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런 기별도 없이 연로한 몸을 이끌고 모스크바에서 극동의 하바로프스크까지 한달음에 마중을 나왔던 것이다.

조씨는 포석 조명희 선생의 막내 아들이다. 조명희 선생의 자녀 중 딸 선아씨와 아들 선인씨가 별세했으니 이제 그가 선생의 생존해 있는 마지막 자식이다.

포석 조명희 선생은 한국 근현대 문학사에 선구자적 역할을 한 인물로, 한국 최초의 창작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발간했고, 한국 최초의 희곡 ‘김영일의 사’를 썼으며, 한국 최초로 일본과 조선, 러시아 순회 연극공연 활동을 벌였다.

또 한국 최초의 망명작가로, 1928년 소련으로 건너가 교육자, 작가, 언론인, 민족주의자로서의 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하여 극동지역에서 한인들이 꼽은 항일투쟁영웅 59인의 한 명이기도 하다.

조씨는 한국말을 알지 못한다. 겨우 몇 가지의 단어와 간단한 인사말 정도만 알고 있다.

거기엔 그의 비극적 가족사와 한국 근대사의 암운이 병존해 있다. 조명희 선생이 일제 스파이의 누명을 쓰고 1937년 KGB요원들에게 끌려간 뒤 이듬해 총살형을 당했을 때 그는 생후 4개월의 갓난아기였다.

비극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어머니 황명희(마리아)와 세 자녀는 짐짝처럼 열차에 내팽겨진 채 시베리아 벌판을 횡단해 불모지와 다름없었던 우즈베키스탄에 버려졌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그의 어머니 황여사는 억척같이 자식들을 키워 러시아 사회의 중견일꾼으로 성장시켰다.

때문에 그는 한국어 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 생활양식, 가치관 등 모든 것이 생경하다. 그런 까닭에 조씨의 인터뷰는 조명희 선생의 외손자인 김 안드레이(전 타시켄트대 교수)씨의 통역으로 이뤄졌다.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답사단을 보면서 한편으론 뿌듯하고, 한편으론 죄스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버님이 생전에 벌였던 다양한 활동과 업적을 되짚어 그 가치와 위상을 재조명하고 새롭게 정립하려는 노력에 거듭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아들인 제가 해야 할 그 일을 이번 답사단이 해주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생후 4개월 되던 때 부친 조명희 선생과 생이별을 당한 까닭에 선생에 대한 기억이 그에게는 전혀 없다. 그래서 그는 더욱 안타깝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편린이라도 있으면 그 기억 떠올리며 추모의 마음 깊이 새길 수도 있으련만, 부친관 관련된 한 조각의 기억조차 없어 그는 ‘아버지의 부재’를 그저 막연한 공포로만 느껴왔었다.

“어머니(황 마리아)로부터 말씀은 들었지요. 아주 합리적인 분이셨다고 합니다. 말을 똑바로 하고 정확하게 말씀 하시는 분이셨다고요. 행동에 있어서 옳다고 여기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분이시기도 했는데, 남 도와주길 잘하고 약자 편에 늘 서며, 최고 난관에 빠진 사람들 일을 늘 당신의 일처럼 돌보던 분이셨다고 합니다.”

조명희 선생의 마지막은 비극적 결말로 끝났지만 선생의 후손들은 러시아 각계 각층에서 중견 일꾼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조씨와 작고한 그의 형 선인씨는 러시아에서 수력발전소 관련 건축 프로젝트를 맡아 명성을 떨쳤고, 그의 아들 조 파엘(52)씨는 모스크바 중심가에 84층 건물을 가지고 있는 재력가로 활동하고 있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