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국(청주시 문화예술과장)

 

붉게 물들었던 잎들이 지고 향기도 사라진 온 산하가 흰 빛으로 순연하다. 북풍한설이라고 했던가. 찬바람 가득한 회색도시로 쏟아지는 햇살조차 춥고 쓸쓸해 보인다. 세모에 눈발이 날리더니 새 해 첫날은 바람까지 매섭다. 견디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했던가. 아픔을 견뎌야만 상처난 곳에 새 순 돋고, 아픔의 마디와 마디를 넘어야만 더 큰 꽃대를 만들 수 있다. 그래야만 따뜻한 봄날 내 마음에 향기 나는 매화를 피울 것이다.
연말에 이어령 초대 문화부장관을 2015동아시아문화도시 명예조직위원장으로 위촉했다.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 사람들도 냉소적이었다. 그 분이 수락하겠느냐, 고령이라서 활동할 수 있겠느냐, 강한 성격을 어떻게 풀어갈 것이냐, 괜한 시간 낭비하는 것 아니냐…. 그러면서도 수락만 한다면 청주 시민들은 2015년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라며 은근히 기대를 하는 눈치였다. 통합 청주에 대한 새로운 미래가치를 만드는 일에 이어령의 철학과 열정과 아이디어와 브랜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비는 제갈량이라는 인재를 얻기 위해 삼고초려(三顧草廬)했지만 우리는 오고초려를 했다. 충청도 출신의 동아시아 최고의 석학인데다 88서울올림픽 개폐막식을 지휘하고, 새천년위원장을 맡으면서 다양하고 창의적인 문화사업을 펼쳐왔으며, 쓰레기매립장을 세계적인 문화와 생태의 숲으로 탈바꿈시킨 난지도프로젝트를 이끌어왔고, 인천공항을 세계 최고의 공항을 만드는데 기여하는 등 행동하는 크리에이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아시아 30인 위원회를 만들어 10년 째 교류사업을 전개해 오고 있으며 지칠 줄 모르는 창작열과 집필활동을 통해 100여권을 책을 출간하는 등 팔순을 넘겼지만 영원한 ‘청춘’ 이어령이 아니던가.
위촉식장에서 당신이 던지 화두가 심금을 울린다. 청주는 바이오와 생명쌀과 가로수길과 대청호와 상당산성 등 맑고 향기로움을 간직한 곳이기 때문에 ‘생명도시’로 가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직지와 한글과 교육도시 이미지는 세계 최초의 ‘디지로그시티’로 만들면 좋겠다는 것이다. 청주와 청원이 통합되면서 새로운 도시를 가꾸어야 하는데 획일적인 잣대나 할거주의로 삼류도시를 만들지 말고 세계 최고의 생명도시, 디지로그시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은 “이것이 나의 마지막 작은 선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팔순잔치를 하면서 모든 것을 부려놓자고 했는데 ‘의외의 일’이 생겼다며 “그동안 펼쳐왔던 수많은 사업의 DNA를 모아 청주에 쏟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명예위원장이라는 이름답게 뒤에서 보이지 않게 하겠지만 국내외 주요 전문가들을 참여시키고 협력하며 조언하는 등 청주가 동아시아문화도시를 넘어 세계 최고의 문화도시로 가꿀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날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오송역에서 내린 일행은 오송 바이오산업단지와 청주국제공항과 오창평야를 둘러보았다. 청주한정식으로 달달한 오찬을 한 뒤 옛 청주연초제조창을 둘러보고 가로수길도 함께 달렸다. 고향냄새가 끼쳐온다고 했다. 그러면서 디자인과 생태와 건축과 문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수많은 생각과 아이디어를 토해냈다. 아이디어가 좋다고 현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며 걱정의 말씀도 던졌다. 시민과 행정과 정치권이 하나가 돼 참여와 협력과 열정과 지혜를 모으지 않으면 수주대토(守株待兎)의 아픔을 겪게 될 것이라고 했다.
청주와 함께 동아시아로 선정된 중국 칭다오, 일본 니가타를 보자. 인구 800만 명이 넘는 칭다오는 중국을 대표하는 해양도시, 경제도시, 산업도시, 영상도시, 축제의 도시다. 일본 니가타는 바다와 강과 평야와 도시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농복합도시로 역사문화와 농경문화, 생활문화와 교육문화가 알뜰한 조화가 돋보이는 도시다.
청주시가 이들 도시와 함께하는 것은 복된 일이다. 갈등과 분쟁과 아픔의 시대를 넘어 영혼과 문화와 예술로 하나되는 시대를 열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아가 이어령과 함께 이들 도시와의 교류 속에서 긍정의 청주를 찾고, 청주의 브랜드를 확산하면 좋겠다. 청주가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생명도시, 디지로그시티, 행복도시로 발전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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