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수애(충북대 교수)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갑오년이 저물고 을미년 청양(靑羊)의 해가 밝았다. 넓고 푸른 초원을 유유하게 거니는 하얀 털의 양 무리들을 떠올리면 눈앞에 평화와 풍요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농경문화를 지닌 우리나라에서 양은 친숙한 동물이 아니지만 비슷한 모습의 염소나 산양이 길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유목민들에게 양은 식량과 의복을 해결하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산이었고, 서양 종교에서 양은 희생적인 성스러운 동물로 상징되고 있다. 우리 생활문화 속에도 무덤이나 건물입구에 양을 새긴 석물을 세워 악귀나 재앙의 침입을 막는 수호의 의미가 담겨 있기도 하였다.

  양은 온순하고 무리지어 살면서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살아가는 동물로,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을 하는 동물로 상징된다. 여러 곳에서 갈등이 증폭되고 극단적으로 대립되어 좀처럼 해결될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우리 사회에 올해는 양이 상징하는 순종과 희생, 정직과 평화를 되새겨 보는 원년으로 삼았으면 한다.

  산업과 기술의 발달에 따라 생활의 편리성과 표면적인 경제 수준은 높아졌지만 대신 인간적 윤리와 착한 본성을 잃게 된 점도 많다.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이 수명을 연장하고 획기적으로 생활을 발전시킨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고령사회의 문제를 야기하고 인력의 수요를 감소시켜 실직과 취업난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컴퓨터 기술의 발전은 스마트한 세상을 열어 준 대신 대처하기 어려운 지능적 범죄발생으로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자본주의의 발달은 경제적 양극화라는 새로운 국면을 타개할 돌파구를 찾지 못해 큰 고민에 빠져있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해소하는 것이 행복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 무엇보다 급한 일임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선(善 )함으로 상징되는 양의 해를 맞아 선한 마음을 나누고 베풀어 갈등과 대립을 풀어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명심보감 계선편(繼善編)에 나오는 장자의 말이 생각난다. 於我善者 我亦善之(나에게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나도 착하게 하고) 於我惡者 我亦善之(나에게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도 또한 착하게 할지니라) 我旣於人無惡(내가 처음부터 남에게 악하게 하지 않는다면)

人能於我無惡哉(남도 나에게 악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을 보고 내게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 착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성인이 아니고서야  어찌 나에게 악하게 구는 사람에게까지 착하게 대할 수 있을까? 반문하였다. 하지만 선악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누구에게나 선하게 대하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니 성인의 가르침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혁신과 창조를 더욱 강조하고 사회전반에서 게으름을 경계하여 경쟁적 분위기를 조장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을 살펴보는 것은 물론이고 나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살아가다 보니 인정이 메말라 가는 것 같다. 하루를 버텨내는 것도 힘겹지만 묵묵히 견디며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 곁에서 작은 성의를 모으고 말없이 격려하며 용기를 주는 선한 사람들이 있기에 아직은 훈훈한 정이 더 많은 사회라고 여겨진다. 남모르게 선행을 베푸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 사회가 유지되고 있음에 고마움을 느낀다.

  금년 학교의 시무식은 옛 법원건물을 새롭게 단장한 평생교육원에서 뜻 깊은 행사로 진행되었다. 노점상부터 시작하여 당신에게는 한 끼의 식사에도 충분히 쓰시지 않고 충북대학교 인재양성에 써 달라고 평생 아껴 모은 전 재산 수십억을 쾌척해 주신 신언임 여사의 뜻을 기리는 신언임 홀 현판식을 겸한 자리였다. 행사 격식에 맞추어 고운 한복을 입은 여사님께서는 분에 넘치는 대접이라며 겸손해하셨다. 인사말씀을 청한 자리에서 수줍어하는 모습은 팔십을 훌쩍 넘긴 연세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밝고 건강해 보이셨다. 슬하에 자녀는 없으시지만 그 분의 장학생으로 학교를 졸업한 훌륭한 인재들이 졸업 후에도 여사님의 건강을 돌보며 자녀의 자리를 채우고 있다는 제자들의 미담에 각박하게 살아왔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좀 더 선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새롭게 시작되는 올해 깨끗한 청양의 기운과 함께 힘찬 출발과 희망을 기원한다. 취업을 희망하는 모든 이들이 원하는 일자리를 찾고, 갈등으로 반목하던 가정과 사회가 용서로 화해하고, 곳곳에 선행의 미담이 널리 퍼지는 한 해가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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