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심이 깊은 사회는 건전한 사회이다. 우리나라도 윤리 중심 시대에는 배려심이 남달랐던 민족이었다. 그 시대에는 삼강오륜 사단(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칠정(희, 노, 애, 락, 애, 오, 욕)이 삶의 기준이었다. 사단도 칠정도 모두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마음씨였다. 사단칠정 가운데에서도 우리나라 사람의 성정에 가장 잘 맞는 것은 사양지심이었다. 사양지심은 남을 배려하여 양보하는 마음이다. 특히 맹자는 이를 예절의 극치라 여겼다.

그러나 물질숭배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삶의 기준은 물질숭배 하나로 획일화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사회구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고 복잡해졌다.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 배려심 보다는 이기심으로 무장하게 되어 사람의 마음이 완악해졌다. 소설보다도 더 소설적인 끔찍한 광경이 연출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이런 살풍경 속에서나마 간혹 보이는 타인을 배려하는 광고, 카피, 행동은 더욱 따뜻하게 느껴진다.

버려진 땅에 꽃을 심는 게릴라 가드닝은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한다. 전동차 안의 노약자 장애인 보호석, 소녀 돌봄 약국 광고, 임산부 보호석에 쓰여 있으되 ‘표시가 나지 않는 임신 초기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시기’라는 카피를 보았을 때는 가슴에서 뜨거운 무엇이 목울대를 향해 올라온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각박하기만 한 것 같지만, 사실은 조금만 마음의 눈을 열고 보면 배려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보를 쌓아놓고 부지런한 손을 기다리는 검색창, 보이스피싱을 예방해주는 ‘뭐야 이 번호’와 같은 앱, 전 지구적으로 친구관계를 맺어주는 SNS는 우리 삶의 공간을 넓혀주고, 의사의 따뜻한 말 한 마디는 환자의 아픔을 달래주며,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 떴을 때 맞이하는 스튜디어스의 밝은 미소는 승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그런가하면 청첩장에 적힌 계좌번호와 같이 정보화시대의 장점을 빠르게 적용한 배려를 보면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류의 스승들은 모두 배려의 대가(大家)로 살았다. 그들이 남긴 말이 몇 천 년을 두고 금과옥조처럼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그들의 삶 자체가 배려였기 때문이다.

석가는 말했다. 너 자신을 밝히는 등불이 되라.

공자는 말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

예수는 말했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맑스는 말했다. 자연은 인류의 마지막 스승이다.

천체는 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운행하고, 해는 또박또박 아침에 떴다가 저녁에 진다. 날이 밝으면 어둠은 반드시 빛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그리고 해가 지면 빛은 어둠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나무들은 그 빛과 어둠을 나눠가지며 숲을 이루고, 그 숲에서 나비와 새가 날고 토끼며 사향노루가 뛰논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였지만, 혼자 잘난 체하다가 낙원에서 쫓겨났다. 혼자 떨어져 살면서 사회적 동물이라 자처하며 마침내 문명사회를 건설했지만 낙원으로 돌아가기에는 몸집이 너무 커졌다.

인류가 다시 자연의 품에 온전히 안길 수는 없지만, 파멸로 가는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선 아낌없이 주는 자연의 배려심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사회적 동물에 머물지 말고 우주적 존재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권희돈 청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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