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작가의 집’을 찾다

▲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작가의 집’ 전경. 외벽이 적벽돌로 견고하게 지어진 이 건물은 조형미가 빼어나다. 1992년 유족들이 찾았을 당시에는 건물 외벽만 남아 있었던 것이 리모델링을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됐다. 이곳 주소도 꼼소몰스카야 거리 52번지였던 것이 80번지로 바뀌었다.

 

(동양일보 김명기 기자) 어찌보면 포석 조명희를 찾아 떠나는 이번 답사는 길을 찾는데서 시작해서 길을 찾는 것으로 끝나는, 미로게임인 듯싶기도 했다.

이 길인가 싶으면 저 길이고, 이 주소인가 했는데 새 주소로 바뀌어 헤매기 일쑤였다.

포석 유족들이 하바로프스크를 방문한 것이 1992년이니, 강산이 변해도 두 번은 변했을 세월. 해서 조 단장이나 김 교수도 답사단의 목적지를 정확히 짚어나아가지 못했다.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찾아가야할 방문지를 찾곤 했지만, 찾지 못하면 어찌하나 하는 일말의 불안감은 늘 가져야 했었다.

‘작가의 집’은 아무르강을 끼고 도는 강변도로 안쪽 경사진 곳에 있었다.

정말 다행으로 건물은 헐리지 않았다. 내내 마음 한편에 자리했던 불안감이 작가의 집을 보자마자 씻은듯이 사라졌다.

작가의 집이 있는 거리가 리모델링 되면서 52번지가 80번지로 변경됐고, 그 건물엔 외상(外商) 은행이 자리잡고 있었다. 외국과 통상을 하는 작은 규모의 은행인 듯했다.

퍽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20여년 전 유족들이 작가의 집을 찾았을 땐 폐허가 되다시피했었는데, 러시아 당국에서 건물의 원형을 잘 복원해 놓았던 것이었다.

김 교수가 건물 동판에 새겨진 글귀를 해석해 주었다.

‘이 건물은 미나예프 고시원으로, 건축이 보물이다. 1902년 세워졌으며, 이 집에서 알렉산드르 파제예프는 1935년부터 1936년까지 살면서 (창작활동) 노력을 했다. 이 건물은 국가가 보호한다.’

대략 그런 뜻이었다.

 

▲ 작가의 집 뒤편. 건물 2층이 포석 가족과 알렉산드르 파체예프가 살던 곳이다. 불이 켜져 있어 철제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으나 열어주는 이가 없었다.

“황명희 여사(외할머니)와 조선아씨(어머니)가 다섯살 때 여기서 살았습니다. 답사단과 함께 이곳을 찾은 블라디미르 외삼촌은 여기에서 태어나셨고요. 어머니께서 작가의 집에서 보낸 유년 시절에 대해 이야기 해준 것이 있었어요. 석탄이 잔뜩 쌓여있는 울타리 뒤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너무나 미운 생각에 석탄을 던지려고 했답니다. 어머니께서도 당신의 아버지(조명희)가 가졌던 일제에 분개하는 마음, 항일 정신을 가졌던가 봅니다. 파제예프는 조명희 선생 가족과 2층에서 같은 부엌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늘 검소한 생활을 하시던 조명희 선생께 황명희 여사가 오랜만에 고깃국을 끓여 드리려 했는데, 어머니(조선아씨)가 그것을 나르다 쏟아버리고 말았답니다. 그때 목에 생긴 화상을 가리키며 어머니는 작가의 집 시절을 그리워하곤 했었습니다.”

 

파제예프(1901∼1956년)는 1905년 러시아혁명으로 아방가르드(avant-garde·전위예술(前衛藝術))가 무너지고 ‘브르주아 세상을 평민들의 세상으로 개혁하자’는 기치 아래 프롤레타리아 문학으로 전환되면서 ‘청년 근위대’, ‘궤멸’ 등을 집필한 소설가이다.

혁명 후 노동자계급의 혁명 투쟁을 그린 ‘어머니’의 작가 막심 고리끼를 비롯해 숄로호프, 에렌브르크, 마야코프스키 등과 더불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발전시켜왔다.

‘계급없는 사회 건설’의 기치는 소비에트 작가동맹에서 공식원칙으로 선정돼 막스주의 유토피아 세상과 결부되며 예술의 새로운 패러다임 제시하게 된다.

알렉산드르 세라피모비치(1863∼1949)의 ‘철의 흐름(Zheleznyj potok), 1924’, 드미뜨리 푸르마노프(1891∼1926)의 ‘차빠예프(Chapaev), 1923’, 알렉산드르 파제예프(1901∼1956)의 ‘궤멸(Razgrom), 1927’, 표도르 글라드꼬프(1883∼1958)의 ‘시멘트(Siment), 1925’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후 스탈린 시대가 막을 내리고 20차 소비에트 당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범죄행위에 대해 비난하는 비밀연설을 하는 동안 12명 정도의 대표자들이 신경쇠약을 일으켜서 밖으로 실려나와 의사의 치료를 받았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인 폴란드 공산당의 강경파 서기장 볼레슬라프 비에루트(1892∼1956)는 며칠 뒤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리고 ‘모범적인 스탈린주의 작가’ 알렉산드르 파제예프는 며칠 뒤에 권총자살하게 된다.

 

▲ 조 블라디미르가 자신이 태어난 작가의 집을 매만지며 상념에 잠겨 있다.

“1991년 유족들이 작가의 집을 다녀간 뒤 아듬해 500만원에 이 건물을 사려고 했어요.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큰 부담까지는 안돼 매입을 추진했는데, 무엇보다 관리 문제가 걸림돌이었지요. 누군가 이 곳에서 이 건물에 대한 관리를 해야 하는데, 그럴 여력까지는 없었죠. 조명희 선생의 산문시 ‘짓밟힌 고려(1928년 10월)’는 막심 고리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후 홍범도 장군이 이 시를 읽고 감동을 받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포석 조명희 선생은 한국인에게 어떤 문학인인가? 포석은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까지 우리나라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노력하고 싸운 항일 투쟁영웅입니다. ‘낙동강’이나 ‘짓밟힌 고려’ 등 선생 대부분의 작품엔 항일의 의연한 정신이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조 단장이 김 교수에 이어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만감이 교차할 이는 따로 있었다. 포석의 가족 중 바로 이곳, 작가의 집에서 태어난 유일한 이, 블라디미르였다.

아련한 감회에 젖어있던 그가 말했다.

“아버님(조명희)의 업적이 길이길이 쌓이는 데 오늘의 방문은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노력들은 매우 소중한 것이죠. 특히 조철호 조카가 아주 열심히 25년 동안 조명희의 이름을 ‘르네상스’ 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애쓴 점 너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블라디미르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조 단장을 돌아보고 “일 많이 하시오, 조카”라고 말한 뒤 “표현이 잘 되지 않아서 죄송합니다”라며 미안해 했다.

 

블라디미르의 말을 받아 김 교수가 감회를 말했다.

“마음이 참 복잡합니다. 우리 가족의 불행, 우리 민족의 불행, 우리 국가의 불행한 역사가 이 건물에 깃들여 있지않나 생각됩니다. 가혹한 강제 이주정책이 시행되고, 고려인들이 살던 마을엔 군부대가 들어서고, 사람들 살던 마을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그 와중에 민족적 지도자였던 포석 조명희 선생은 이 집에 사셨던 것을 마지막으로 불행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사실들을 알게 되면서 저는 가슴이 울었습니다. 몇 십년 동안 살던 흔적들, 논과 밭, 조상들의 묘소에 비석까지 모두 소멸돼 버리고, 피땀으로 이뤄놓은 연해주를 떠나 우리 까레이스키는 낯선 황무지 중앙아시아로 끌려가게 됐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방문한 작자의 집이 보여주는 것은 그 비극적 역사의 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현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가의 집은 붉은 벽돌로 지어져 있었다. 견고하고 튼튼해 보이는 외벽에 외관 또한 조형미를 갖추고 있었다.

1층 현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건물 뒷쪽으로 가다보니 CC(폐쇄회로)TV가 낯선 이방인을 주시했다.

뒷편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철제계단이 설치돼 있었다. 언뜻 보니 2층엔 불이 켜져 있었다. 우리는 실례인줄 알면서도 그 계단을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리모델링으로 내부가 모두 변해있겠지만, 그래도 포석이 마지막으로 살던 집을 보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그러나 몇 번을 노크했지만 안에선 응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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